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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 들판
창간사

이천오백 명의 마을에도 신문이 필요합니다

천 년 동안 쌀을 길러 온 들판, 1927년 불의에 맞선 농민들, 바다 건너에서 품질을 인정받은 서수쌀. 이 마을의 오늘을 마을 사람이 직접 기록하기 위해 「서수신문」을 인터넷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전문 읽기
서수신문 뉴스초점

지난 호에서

지면 서수신문 제2호·제3호에 실렸던 기사 전문입니다. 지면 전체: 제2호 PDF · 제3호 PDF — 창간호(2022.10)는 지면을 찾는 대로 올립니다.

제2호 「서수면마을신문」 2023년 3월

서수를 소개합니다

서수면은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동쪽, 임피와 옥구의 옛 들판이 이어지는 농촌 마을입니다. 인구는 약 2,500명. 넓은 논과 마을, 그리고 그 위를 지나는 계절이 이 마을의 살림입니다.

이 들판의 쌀은 고려 때부터 강과 바다를 따라 나라의 창고로 갔고, 일제강점기에는 도쿄와 오사카 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았습니다. 1927년에는 수탈에 맞선 농민들의 항쟁이 이 들판에서 일어났습니다. 작은 마을이지만, 기록할 역사는 작지 않습니다.

위치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서수면
인구
약 2,500명
이름
瑞穂 — 상서로울 서, 이삭 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성립)
역사
1927년 옥구 농민항쟁의 현장 · 서수쌀 도쿄·오사카 박람회 금상
발행처
최연호 외 서수사람들
창간사

이천오백 명의 마을에도 신문이 필요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군산시 서수면이다. 인구 이천오백 명. 도시에서는 아파트 몇 동에 사는 사람 수다. 그런데 이 작은 마을에는 천 년 동안 쌀을 길러 온 들판이 있고, 1927년 불의에 맞섰던 농민들의 역사가 있으며, 바다 건너에서 품질을 인정받았던 쌀의 기억이 있다.

큰 신문은 이런 마을의 일을 다루지 않는다. 누가 회갑을 맞았는지, 어느 마을 정자가 새로 단장했는지, 올해 들판의 작황이 어떤지는 어디에도 실리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은 일은 시간이 지나면 없었던 일이 된다. 나는 역사소설 《천년의 미(米)》를 쓰면서 그것을 뼈아프게 배웠다. 기록이 없어서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들이 이 들판에 너무 많았다.

「서수신문」은 처음이 아니다. 2022년 창간호부터 2024년 제3호까지, 우리는 이미 지면으로 이 신문을 세 차례 펴냈다.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돌려 읽던 신문이었다. 이제 그 이름을 인터넷으로 옮겨 다시 시작한다. 거창한 언론이 아니다. 마을 사람이 마을의 오늘을 적어 두는 공책에 가깝다. 면 소식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들판과 먹거리,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서수의 역사를 담을 것이다. 소설 《천년의 미》도 회차별로 함께 싣는다.

서수신문은 서수 사람 모두의 것이다. 사진 한 장, 소식 한 줄이면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 십 년 뒤 누군가 이 마을의 역사를 찾을 때, 이 신문이 첫 번째 기록이 되기를 바란다.

2026년 9월, 서수 들판에서

필자 |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 역사소설 《천년의 미(米)》 저자

첫 면으로 돌아가기
칼럼

군산 쌀, 다시 현해탄을 건널 때

《천년의 미(米)》에서 찾은 군산 쌀의 역사와 미래

나는 최근 군산 서수 들판의 쌀 이야기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 《천년의 미(米)》를 썼다. 천 년을 이어온 한 톨의 쌀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만나게 된 것은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잊고 있었던 군산의 역사였다.

군산은 쌀의 도시였다.

넓은 호남평야와 금강, 그리고 군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군산항을 통해 수많은 쌀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군산선 철도가 놓이고 정미소와 창고가 들어선 것도 쌀과 무관하지 않았다. 군산의 근대사는 쌀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 중심에 옥구와 임피, 그리고 오늘의 서수 들판이 있었다.

지역 향토자료에는 서수 일대에서 생산된 쌀이 일제강점기 일본 도쿄와 오사카의 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았고, 이후 일본 황실에 진상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나는 《천년의 미》를 쓰면서 이 대목을 오래 바라보았다. 수탈의 시대에 우리 땅에서 생산된 쌀이 일본에서 품질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군산 쌀이 지닌 또 하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쌀은 우리에게 영광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나라를 빼앗긴 시대, 농민들의 땀과 아픔이 함께 실려 나간 치욕의 역사였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내몰렸고, 옥구와 서수 일대에서는 식민지 농업수탈에 맞선 농민들의 저항도 이어졌다. 그러나 역사의 아픔 때문에 한 가지 사실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시대에도 군산과 옥구·서수 들판에서 생산된 쌀의 품질이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100여 년 전 일본시장에서 인정받았던 군산의 쌀을, 이제는 우리가 주인이 되어 다시 일본으로 보내면 어떨까.

과거에는 빼앗긴 나라의 쌀이 현해탄을 건넜다면, 이제는 대한민국 군산의 이름을 단 상품이 당당하게 현해탄을 건너야 한다.

그렇다고 20kg짜리 쌀 포대를 그대로 일본에 수출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가공’과 ‘이야기’다. 일본의 생활 방식은 이미 크게 변했고, 1인 가구와 고령층을 중심으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의 수요도 커졌다. 군산 쌀을 즉석밥, 냉동김밥, 주먹밥, 쌀과자, 떡, 쌀가루 식품 등으로 가공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여기에 ‘100여 년 전 일본에서 품질을 인정받았던 군산 쌀’이라는 역사적 스토리를 결합한다면 다른 지역의 쌀과 차별화할 수 있다. 이제 농산물도 단순히 품질만으로 경쟁하는 시대가 아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산자의 이야기를 함께 팔아야 한다.

프랑스의 와인이 지역과 역사를 팔고, 일본의 사케가 마을과 장인의 이야기를 파는 것처럼 군산도 쌀 한 톨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담아야 한다. ‘100여 년 전 일본에서 인정받은 군산의 쌀, 이제 대한민국 군산의 농민과 기업이 가공한 상품으로 다시 일본시장에 나선다.’ 이것은 충분히 경쟁력 있는 이야기다.

특히 군산에는 항구가 있고, 광활한 들판이 있으며, 농협과 식품기업이 있다. 새만금이라는 새로운 산업 기반도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각각 흩어져 있는 자원을 하나의 수출전략으로 묶는 일이다.

나는 군산시와 농협, 생산농가, 식품기업이 함께하는 ‘군산 K-라이스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싶다. 처음부터 거창할 필요는 없다. 일본의 한 지역, 한 유통점, 한 축제를 대상으로 군산 쌀로 만든 즉석밥이나 냉동김밥, 쌀가공식품을 시험 판매해 볼 수 있다. 현지 소비자의 반응을 확인하고 맛과 포장, 가격을 개선하면서 시장을 넓혀 가는 것이다.

쌀을 더 생산하는 것만이 농업정책이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이제는 어떻게 가공하고, 어떤 이야기를 입히며, 어느 시장에 팔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100여 년 전 군산의 쌀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현해탄을 건넜다. 이제는 그 길의 의미를 바꿀 때다. 이번에는 빼앗겨 가는 쌀이 아니라, 우리 농민이 생산하고 지역기업이 가공해 군산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계시장으로 나가는 상품이어야 한다.

《천년의 미》를 쓰며 내가 오래도록 바라본 서수 들판은 단순한 농촌의 들판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아픈 역사도 있었고, 저항의 역사도 있었으며, 바다 건너 시장에서 품질을 인정받았던 쌀의 기억도 있었다.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 역사에서 미래를 찾아내는 것이다.

군산 쌀의 두 번째 현해탄 횡단을 이제 우리가 준비할 때다.

필자 약력 | 전 KOTRA 수출전문위원 · 현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 역사소설 《천년의 미(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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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서수(瑞穂·みずほ), 이름 하나에 한일의 역사가 있다

과거의 감정을 넘어 지역의 이름을 미래의 자산으로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군산시 서수면이다.

매일 부르고 듣는 ‘서수’라는 두 글자를 우리는 너무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이름을 한자로 쓰면 瑞穂다. 상서로울 서(瑞), 이삭 수(穂). 풍년을 바라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그런데 이 두 글자를 일본에서는 어떻게 읽을까.

みずほ(미즈호)라고 읽는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흥미로워진다.

일본의 고대 기록을 찾아가면 ‘瑞穂’라는 말은 단순히 벼 이삭을 뜻하는 보통명사에 머물지 않는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豊葦原瑞穂国(とよあしはらのみずほのくに)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갈대와 벼 이삭이 풍요롭게 자라는 나라’라는 뜻으로, 고대 일본 신화에서 일본 국토를 아름답게 표현한 명칭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우리가 한자 그대로 ‘서수국’이라고 읽을 수는 있지만, 이것을 별개의 고대국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면 ‘미즈호의 나라’, 즉 일본 국토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던 고대의 미칭이다.

그렇다면 왜 군산의 한 농촌마을 이름에 일본의 고대 국토를 상징하던 瑞穂라는 두 글자가 들어오게 되었을까.

현재의 서수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이 지명의 형성과정에는 일제강점기의 역사와 일본인 농장 경영의 흔적이 얽혀 있다는 지역사회의 문제 제기도 이어져 왔다.

이 때문에 서수라는 지명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생각도 하나일 수 없다.

누군가는 풍년을 기원하는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지명이므로 식민지 역사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래전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부터 이 이름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한일의 역사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더욱 복잡해진다.

일본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는 지금도 高麗(こま·고마)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716년 고구려계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高麗郡이 설치됐고, 오늘날에도 高麗神社, 高麗川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여기서 ‘高麗’라는 한자는 우리가 흔히 ‘고려’라고 읽지만 역사적으로는 고구려계 도래인과 관련된 이름이다.

백제의 흔적은 더욱 많다.

오사카에는 과거 百済郡(くだらぐん·구다라군)이 있었고, 지금도 百済大橋, 百済公園, 南百済小学校와 같은 이름이 남아 있다. 히라카타시에는 백제 왕족 후손과 관련된 百済寺跡(くだらでらあと)도 남아 있다.

신라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사이타마현 니자시 일대에는 758년 新羅郡(しらぎぐん·시라기군)이 설치됐고, 이후 명칭이 변하면서 오늘날의 니자(新座)라는 지명으로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이런 지명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지만, 사람과 기술과 문화는 수없이 바다를 건넜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고 어느 한쪽이 받기만 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한일관계를 두 개의 극단에서 바라보곤 했다.

나라가 가난하던 시절에는 일본의 경제력과 기술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낮추는 열등의식이 존재했다. 반대로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산업국가로 성장하고 문화와 기술에서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때로는 일본을 지나치게 낮춰 보는 우월의식도 나타난다.

나는 이제 두 가지 모두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역사대로 정확히 기억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의 침탈과 수탈을 잊어서도 안 되고, 옥구와 서수 농민들이 불의에 맞섰던 역사 역시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과 미래를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과거 때문에 영원히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도 성숙한 자세가 아니며, 오늘 우리가 조금 잘산다고 과거의 역사와 상대방을 가볍게 바라보는 것도 성숙한 자세가 아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열등감도 우월감도 아닌 자신감이다.

그리고 그 자신감 위에서 한일관계를 철저하게 실용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뜻밖에도 ‘서수(瑞穂·みずほ)’라는 이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에게 ‘미즈호’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다. 풍요로운 벼와 농경문화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우리 서수 역시 넓은 들판과 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름을 과거의 논쟁 속에만 가두어 둘 것이 아니라 미래의 자산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SEOSU 瑞穂 RICE’, ‘SEOSU MIZUHO’. 그리고 군산 서수의 역사와 농민의 이야기를 담은 즉석밥·냉동김밥·쌀과자·쌀가공식품. 단순히 상품 하나를 파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서수와 일본의 ‘미즈호’라는 언어적·문화적 접점을 이야기로 만들고, 일본의 高麗·百済·新羅의 역사적 흔적과 연결해 민간교류의 소재로 활용하는 것이다.

서수 주민과 일본의 지역주민이 만나고, 청소년과 어르신이 왕래하며, 농식품 기업과 농민이 함께 제품을 만들고, 지역축제에서 서로의 상품을 판매하는 교류라면 거창한 외교보다 오히려 오래갈 수 있다.

첫 번째 칼럼에서 나는 군산 쌀의 ‘두 번째 현해탄 횡단’을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쌀만 바다를 건너서는 안 된다. 사람과 이야기와 지역의 이름도 함께 바다를 건너야 한다.

서수라는 두 글자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도 있고, 한일 양국이 오랫동안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더 오래된 역사도 숨어 있다.

이제 그 이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과거에는 역사가 우리를 끌고 갔다면, 이제는 우리가 역사를 활용할 차례다.

서수(瑞穂·みずほ).

작은 농촌마을의 이름 하나를 한일 민간교류와 군산 농식품의 브랜드로 바꾸는 일.

나는 그것도 지역이 역사를 기억하는 하나의 성숙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필자 약력 |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 역사소설 《천년의 미(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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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소식

찾아가는 미용봉사, 어르신 댁까지 간다

서수면 미용봉사단이 마을회관과 어르신 댁을 찾아 머리를 다듬어 드렸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은 집으로 직접 찾아가 손질했다.

미용 전문기술을 가진 회원들이 마을을 돌며 이어 온 봉사는 아이마을·용성마을·용회마을·외무장마을·내무장마을·성모요양원 등에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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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소식

무궁화문화복지센터, 주민의 사랑방으로

서수면 무궁화문화복지센터는 공방 교육, 바리스타 교육, 건강 프로그램, 주민 모임이 열리는 면의 중심 시설이다. 1층 북카페는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이달의 프로그램·이용시간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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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소식

서수면사람들 운영위원회 확대회의

사단법인 서수면사람들 운영위원회가 확대회의를 열어 올해 사업 방향과 마을별 프로그램, 서수쌀 먹거리 개발 계획을 논의했다.

(날짜·주요 안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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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검정 고무신에 핀 꽃 — 공방 교육 현장

무궁화문화복지센터 공방 교육에서 주민들이 붓을 들고 검정 고무신에 꽃을 그렸다. 서로의 신발을 들여다보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완성된 고무신은 바자회에 내놓아 수익금을 이웃 돕기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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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내무장마을, 마을회관에서 열린 주민 프로그램

마을회관을 찾아가는 주민 문화프로그램이 내무장마을에서 열렸다. 아이마을·외관원·용회마을에서도 같은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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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서수초 아이들, 마을에서 배우다

서수초등학교 학생들이 마을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서수신문은 아이들의 글과 그림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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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과 먹거리

서수 들판에 카사바를 심어 보다

벼농사 일색의 서수 들판에서 새 작물을 시험한 카사바 재배와 수확·가공 체험. 올해 작황과 수매 일정, 병해충 정보도 이 자리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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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과 먹거리

미즈호(瑞穂) 서수쌀, 일본으로 가는 길

100여 년 전 도쿄·오사카 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은 서수쌀. 이번에는 우리 이름 「미즈호(瑞穂) 서수쌀」로 일본에 보내는 대일 수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관련 칼럼: 군산 쌀, 다시 현해탄을 건널 때, 서수, 이름 하나에 한일의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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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과 먹거리

서수쌀로 구운 붕어빵, 마을회관 시식회

서수쌀 쌀가루로 만든 붕어빵을 어르신들과 함께 맛보는 시식회가 마을회관에서 열렸다. 쌀 막걸리·쌀빵에 이은 서수쌀 먹거리의 새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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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면 소식

서수면 농촌중심지활성화 사업 복합건물 준공 눈앞에

군산시 서수면 청사와 연계한 행정·복지·문화 복합건물로 — 서수면 주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서수면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의 일환으로 서수면 청사와 연계한 행정·복합건물이 곧 준공될 예정이다.

현재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행정·복합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하 1층에는 보일러실과 창고가 위치하고 있으며, 지상 층에는 서수면사무소, 주민들의 만남과 소통의 장소인 북카페, 그리고 공동체 활성화 사업 및 주민 문화복지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실과 주민건강을 책임지는 헬스장이 마련되었다. 또한 2층에는 대강당과 다목적회의실이 갖추어져 있고 서수면 들녘을 감상할 수 있는 조망대도 갖추어질 예정이다.

서수면 행정 복지 복합건물은 군산시 서수면 청사를 연계하여 건축된 것으로, 지역 주민들이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군산시 행정서비스와 다양한 지역 문화 예술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고 가벼운 커피를 마시며 주민간의 만남과 소통을 이어갈 수 있는 북카페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농촌중심지활성화 사업 사무국장(이정란)은 북카페를 거점으로 하여 지역민의 소통과 화합에 중점을 두고 그동안 역량강화 차원에서 개발한 막걸리 및 쌀빵 등 지역 특산품을 개발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며, 서수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비롯한 많은 생산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샵을 만들고 국내외 온라인 쇼핑몰과 연계하여 전국적인 유통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라며,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이 운영위원회 체제에서는 보다 오픈된 체제에서 지역주민과 서수면이 발전할 수 있는 상생의 길을 찾아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행정·복합건물은 농촌 지역의 중심지 활성화를 위해 마련된 것으로, 지난 2017년 농림축산식품부 사업으로 선정된 이후 올해까지 총사업비 78억 원을 투입하여 사업을 시행하였으며, 지역 주민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과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감으로써 지역 상권을 활성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서수면 농촌중심지활성화 사업 위원장(최연호·용성마을)은 이번 복합건물 준공은 서수면 발전과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이후 농촌 협약사업을 비롯하여 농축산식품부, 전라북도, 군산시와 연계하는 규모의 사업을 유치해 서수면 경제 발전과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수면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 추진활동 연혁
2016.03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추진위원회 구성 / 2016.05 선진지 견학 / 2016.07 주민특강·간담회·전문가 초청교육 / 2017.01 공모신청 / 2017.03 전북도 심사 / 2017.05 농식품부 심사 / 2017.09 농중활사업 최종선정 / 2018.04 운영위원회 발대식, 1·2차 현장포럼 / 2018.05 3차 현장포럼 / 2018.06 1·2차 소위원회 / 2018.10 행정협의 / 2019.01 행정협의 / 2019.02 실과협의·전라북도협의 / 2019.04 이장단 설명회·주민공청회 / 2019.12 지역역량강화 수행사 선정 / 2020.04~12 동아리(탁구·서예·판소리) 운영 / 2021.02~03 바리스타 교육(자격증 취득) / 2021.09 마스크 제작 및 배포 / 2021.10 서수면 통합브랜드 개발 / 2021.11 선진지 견학, 식품개발·품평회 / 2022.04 서수면 주민공동체 교류행사·선진지 견학 등 / 2022.10 서수면마을신문 창간호 제작 / 2023.03 서수면마을신문 제2호 제작

지면 서수신문 제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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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인사말

숭고한 선열들의 얼이 서려 있고, 다양한 산업 활동을 통해 풍요롭고 살기 좋고 인심 좋은…

서수면마을신문 창간에 부쳐

안녕하세요. 지난 1월 인사에 의해 서수면장으로 부임한 이유청입니다.

서수면은 드넓은 평야에서 좋은 미질의 쌀을 생산하는 쌀농업 지역이자 각종 원예 및 특용작물 재배로 다양한 농업 혁신을 선도하는 지역이기도 하며 또한 군산의 대표적인 축산업지역으로 농축업 및 원예 산업이 발전한 고장입니다. 그리고 마룡리에 위치한 동군산 산업단지(구 서수농공단지)에는 식품, 목재, 의복, 금속기계 등 40여 개의 다양한 기업들이 위치한 산업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수면은 춘고 이인식 선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이자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의 착취와 폭압에 맞서 싸운 가장 큰 항쟁인 옥구농민항일항쟁의 시발점인 지역이기도 하며, 상주사, 보천사, 천지사 등의 사찰과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서수교회 등이 있는 종교 및 역사 문화지역이기도 합니다.

이런 숭고한 선열들의 얼이 서려 있고 다양한 산업 활동을 통해 풍요롭고 살기좋고 인심좋은 서수면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해 서수면 마을신문이 창간되어 주민들에게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타지역에는 서수면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서수면 마을신문이 앞으로 많은 주민들의 다양한 얘기를 진솔하게 담아주고 지역 주민의 소통의 장이 되어 주기를 바라며 또한 우리 서수면에서 생산하는 많은 농특산물과 서수면의 여러 볼거리, 먹거리 등의 자랑거리를 홍보하는데 앞장 서 주는 신문이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최근 코로나 및 경제위기로 매우 어렵고 힘든 시기이지만 서수면 주민 모두가 하나되어 함께 헤쳐나간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으며 그 함께하는 화합의 장이 바로 서수면 마을신문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서수면 마을신문이 앞으로 우리 지역주민의 자긍심과 희망을 담은 지역 신문으로 성장해 나가기를 바라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지면 서수신문 제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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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서수면 역사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 본격적 시작을 알립니다

서수면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에서 행정 문화 복지 복합타운으로 청사 건립을 시작한지 6년 만에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번 신청사로 우리 서수면 주민들의 문화 복지 수준이 향상되고 아름답고 편리한 경관과 시설을 통해 우리 주민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행정서비스와 문화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이란 농촌지역의 인구 감소와 농업 생산성 저하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켜 소득 증대는 물론 일자리 창출 나아가 우리지역이 가지고 있는 문화 유산을 발굴 보존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문화적 만족도를 높여 농촌 관광 활성화를 이루고 주민들의 참여와 활동을 유도, 네트워크를 통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여 지역 발전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서수면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 운영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사업을 목표로 사업을 진행하려 합니다.

첫째, 농업과 관광의 융합은 농촌 지역의 경제 활성화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전략적 방안 중 하나입니다. 농업과 관광을 융합하여 지역의 농산물을 홍보 판매하며, 지역의 문화와 자연 환경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 등을 제공함으로써 외부인들의 방문을 유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융합은 지역 주민들의 일자리 창출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이끌어 내는 효과도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 지역에서 생산할 수 있는 특화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고 육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지역에서 생산되는 제품이나 서비스는 브랜드가 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 지역의 이미지를 향상시키고 관광산업 등 다양한 부가적인 이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 지역 문화유산은 지역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며, 관광 산업과 연계하여 지역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지역 자원을 활용하여 관광 산업을 육성하고, 지역특색을 강조하는 프로그램 등을 개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넷째, 자연 환경은 지역 자원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지역 환경을 보전하고 개선하여 관광산업과 생산 활동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지역 내 적극적인 환경 활동은 지역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으며, 이는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다섯째, 농산물을 이용한 건강기능식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등의 방식이 있으며, 식품 가공 산업을 육성하거나, 농촌 체험 산업을 활성화시켜 이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고 지역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젊은층과 다문화가정에게 창업교실을 열어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인드로 우리가 우리지역 위해 한마음이 되어 한 걸음 한걸음 나간다면 우리 서수면은 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올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서수사랑"이란 캐치프레이즈로 1천명의 서수출신의 회원을 모집하면서 활성화 사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이는 "서수사랑 기부제" 또는 "서수사랑 후원제"로도 명칭될 것입니다. 적극적인 참여와 후원을 기대하며 서수면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의 본격적인 사업을 시행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지면 서수신문 제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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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서수면 옥구농민 항쟁사

서수 이엽사 농장의 실체 (二葉社 農場의 實體)

1904년에 한국에 온 가와사끼료타로(川崎藤太郎)는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인 하기하라(萩原秀一)의 권유에 따라 옥구군 서수면에 900여 두락(1斗落은 한마지기 논 200평, 밭 300평), 약 20만평에 이르는 토지를 매입하여 가와사키농장(현 임피중학교)을 설치하였다.

일본 국수주의자인 가와사끼는 서수면(동이면)을 자기 고향인 니이가타현 기타칸바라군(新潟縣北浦原郡)을 모델로 하여 일본화할 계획을 처음부터 추진하였다.

먼저 자기와 뜻이 맞는 가타기리(片桐) 시부다니(澁谷) 등 고향 지주들을 서수에 불러들여 농장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기타기리(片桐和二)는 川崎의 안내을 받아 1908년에 옥구군 서수면 뿐만 아니라 익산군 황등과 김제군에 농장을 설치하였으며 임익수리조합(臨益水利組合)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여 2대 조합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달관산(達觀山, 현 황등산)을 매수하여 석산(石山)을 개발하여 일본에 가져가기도 하였다.

가와사키는 일인 농부 10인을 불러들여 조선인 소작인들을 감독하도록 하였고 보수로 12정보의 농지에 대한 자작권을 부여하였다고 한다.

1909년 봄에는 고향의 향토신을 옮기어 하용리(하용전 마을)에 서수신사(瑞穗神社)를 세워 서수면을 일본 자기고향 화하기 위한 정신통제수단으로 일본신도(日本神道)의 위력으로 소작인들을 공포속에 몰아넣어 꼼짝도 못하게 하였다. 군산공원에 세운 군산신사보다 6년이나 앞서서 세운 것으로 보아 가와사키의 제국주의 의식과 면모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가와사키농장은 근대적인 대규모 농장이라는 영농조직체에서 보안조직체이고 식민조직체이기도 하였다. 그는 농장을 설치하자마자 〈실천회〉라는 경비대를 편성하였고 1910년에는 소작인을 대상으로 금융업을 경영하려고 〈서수식산조합〉을 설립하여 소작인을 지주 마음대로 예속시켜 조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니가타 현 출신의 시로세, 가다기리, 히로가와, 마끼등 농장주들의 자본을 모아 1911년 이엽사농장(二葉社農場)을 만들었고 1926년 가와사키가 사망하자 서수의 가와사키농장을 매입하고 이엽사 사무소를 전주부에서 서수부로 이전하였다.

이때 합명회사에서 주식회사로 전환한 이엽사농장은 전주부, 삼례부, 황등부, 서수부 등으로 나누어 논 1,000정보(3백만평) 밭 200정보(60만평)와 1,700명의 한국인 소작인을 거느리는 대농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가와사키 사망으로 같은 고향의 사이또오가 총지배인으로 취임하였고 승마를 좋아하였던 사이또오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이엽사농장에 소속된 삼례농장 황등농장 서수농장을 순찰하였다고 한다.

사이또오(齊藤信一)가 농장을 승마복에 권총을 차고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말채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말을 타고 소작인들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위세를 부릴 때에는 겁에 질린 노인과 부녀자들은 집안에 숨어야 했고 남자들은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이또오는 고개하나 끄덕이는 법이 없었다고 하며 봉건시대 통치자인 영주나 다름없는 오만 불손한 태도였다고 한다.

주식회사 이엽사농장은 하나의 관청이상의 대기업 조직이였다고 볼 수 있으며 이엽사농장은 일본내에서도 1,000정보 이상 소유한 지주 수는 북해도에 13명 본토에는 9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규모를 짐작케 한다.

그럼에도 우리 한반도에는 34명이나 있었고 그 중에서도 전라북도에는 가장 많은 9명이 있었다고 한다. 1위는 구마모토 농장(3,358정보) 2위 이엽사농장(1,425) 3위가 시다마니농장(1,231) 순이였다고 한다. (출처: 군산문화원. 향토문화대전)

이와같이 100여년전의 서수면의 불행했던 역사적 과거의 사실을 우리는 배우고 기억하며 이를 승화시키기위한 노력들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며 보다 미래 발전적인 방안을 창출하는데 우리 모두가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이에 필자는 2016년 니가타현 문화청에 메일을 보내 현재 이엽사의 존재 유무 및 관련 후손들을 찾아 달라는 메일을 보낸적이 있다.

이에 대한 니가타현 문화청의 대답은 이엽사는 한국으로 자본투입이 많아서 1946년 결국 도산하여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답변을 받은적이 있다. 1945년 일본패망으로 빈손으로 도망가기에 바빴을 처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는 일이긴 하나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을 것이 있다"는 말처럼 분명 후손들은 잘 살고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에 이엽사 후손을 찾아 가해자의 후손과 피해자의 후손들이 모여 과거 우리고장의 역사를 더듬어 가며 순수한 민간차원의 미래 지향적 상호교류를 논해 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시도해 본 것이였다. 물론 시간도 걸리고 자본도 들겠지만 이 또한 우리가 해야 할 필연적인 사안 인지도 모른다.

하나 하나의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진정한 교류만이 미래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지면 서수신문 제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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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서수면 인물

양일동(梁一東)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1912년 서수면 마룡리 하장곤마을 출생

독립운동 시절 김구의 제자로 활동한 후 정치에 입문하여 1980년까지 반공법 등의 제재로 원활하지 않은 정치 생활 끝 5선 의원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뜻을 같이한 동지로는 민주화 운동 당시 장준하, 김대중 등이 친한 편이었고 윤보선, 김영삼, 문익환 목사 등 여러 재야 인사들과도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신민당이 유진산 체제였을 시절, 기존의 타협적인 당의 태도에 반발하는 의원들을 이끌고 선명야당을 위시하여 민주통일당, 즉 제3야당을 창당하여 독자 노선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1965년 양일동 본인이 반공법으로 구속된 적이 있을 정도로 거침없이 국회의원을 탄압하고 반정부 행위를 탄압하는 이중에 선명야당을 위시한 민주통일당을 가만둘 리 없었기에 많은 고초가 뒤따랐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대통령 윤보선은 박정희와 대통령 선거전을 할 당시 '남로당 출신 박정희는 뒤에서 비겁하게 행동하지 말고 남자답게 나와 주먹으로 대결을 하자'라고 말했을 정도로 박정희에게 격분하여 막말을 한 적도 있다.

박정희 정부시절 독재 타도를 외치며 제3야당 창당을 주도하였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생애
1912년 12월 30일 전라북도 임피군 동이면 장곶리(현 군산시 서수면 마룡리 하장곤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동중학교 재학 중이던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동조시위를 주도했다가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같은 해 3월 오재덕(吳在德)·이영욱(李永昱)과 함께 중화민국 베이징시로 건너가 백정기·정내동(丁來東) 등과 접선, 교류하게 되면서 무정부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

졸업 후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그는 1931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그해 4월 한하연(韓何然)·최낙종(崔洛鍾)·정찬진(丁贊鎭) 등의 동지들과 함께 흑우연맹(黑友聯盟)이 주관하는 『흑색신문(黑色新聞)』의 편집위원에 선임되어 무정부주의 사상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으며, 1932년 9월에는 마찬가지로 무정부주의 단체인 조선동흥노동동맹(朝鮮東興勞動同盟)에 가입하였다.

1933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시 소재 민탁고급학교(民鐸高級學校)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5월 오우영(吳宇永)·이윤희(李允熙) 등 일본 소재 무정부주의 단체 대표들과 연합하여 반파시즘·반제국주의·반(反)실업 등을 투쟁의 목표로 삼았다. 1934년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상하이 소재 무정부주의 단체였던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유자명(柳子明)·정현섭 등에게 『흑색신문』·『토민(土民)』·『무궤도열차(無軌道列車)』 등의 출판물을 부치면서 연계투쟁의 방안을 모색하였고, 이즈음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처단미수사건으로 백정기·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 등이 일본에 압송되자 이들의 구호활동에 힘썼다.

그 뒤 그는 조선동흥노동동맹의 기관지인 『뉴우스』의 발행인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1935년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30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으며, 1935년에는 전단물을 가지고 일본에 가던 중 그해 11월 3일 일본의 공항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일본 이치타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복역 2년 8개월만에 가석방되고, 고국으로 압송되어 귀환한 뒤에는 줄곧 농촌운동과 농민교육에 종사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면서 이승만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하였는데 우익에 소속되었다.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에서는 야당계 무소속으로 제3대, 제4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주당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제2공화국 때는 민주당 소속으로 제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0년 12월 14일 다른 민주당 구파 소속 정치인들과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에 몸담았다. 그러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정치규제에서 풀린 이후에는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진산 파동 때 범 유진산계였다가 따로 자신의 계보를 만들면서 유진산과 사이가 멀어졌다.

결국 1973년 김홍일 등과 신민당을 탈당하여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을 창당하였다. 그 해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성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중선거구제 하에서 신민당 정운갑 후보, 민주공화당 민병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성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제만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이듬해인 1979년 5월 선명야당 노선을 내세운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로 취임하자 신민당과 함께 반 유신정권 투쟁에 동참하였다.

그러다가 10대 국회 임기 중이던 1980년 4월 1일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그의 별세로 소속의원들과 당직자들의 잇따른 탈당으로 인해 존립마저 위태로워진 민주통일당은 사실상 와해되어 버렸으며, 얼마못가 5.17 내란으로 강제해산 된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지면 서수신문 제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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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축사

서수면·회현면 농촌중심지활성화 사업, 상호 교류 및 홍보 등 협력하기로

회현면도 복합건물로 착공 — 농촌 콘텐츠 발굴에 노력

서수면과 회현면의 농촌중심지활성화 사업 운영위원들이 준공을 앞둔 서수면 복합건물 앞에서 만나 두 지역의 상호 교류와 홍보에 협력하기로 했다. 회현면도 복합건물 착공에 들어갔으며, 두 지역은 농촌 콘텐츠 발굴에 함께 힘쓰기로 했다.

※ 지면에는 제목과 사진만 실렸고 본문은 실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만남의 내용을 알려주시면 보완하겠습니다.

지면 서수신문 제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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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서수면 사람들(인물)

은행나무 고목제 (서수면 관원리)

서수면 북쪽에는 익산시 웅포면, 함라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관원리가 있다. 그중에서도 풍요롭고 살기 좋다는 원관원 마을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20여 년 전부터 마을 뒤에 있는 은행나무에 매년 봄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일명 "은행나무고목제"는 마을의 안녕과 재해와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마을 주민과 외지에 나가 있는 이 마을 출신 모두에게 무사기원을 비는 제사인데 이 때는 주민은 물론 이 마을 출신 모두를 초대하여 마을의 단합과 결속을 다지고 있어 매우 뜻있는 마을행사로 거듭나고 있다.

마을주민 어르신 손창식씨(72) 이야기에 따르면 어렸을적 나무속에 든 족제비를 잡기 위해 한 주민이 은행나무에 불을 놓았는데 오래된 고목인지라 삽시간에 불이 번져 불을 끄느라 소방대까지 출동하는 등 마을에서 한바탕 소동이 났었다고 그 후 별 탈 없이 은행나무는 속이 비어 있는 상태로 쭉쭉 자라 둘레가 약 5~6미터나 되어 1982년도에 보호수로도 지정되었고 마을 주민들의 각별한 관심을 받아서인지 가지가 옆으로 20여 미터나 뻗어나가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는데

나무 밑에 사는 주민(?)들이 가지가 부러지면 집이 부서지게 생겼다고 시에 민원을 제기해 집 쪽의 뻗은 나뭇가지를 잘라내니 나무가 시름시름 말라 죽었고 지금의 나무는 속이 빈 곳에 은행이 떨어져 자연 발아한 자식 나무로 신기하게 여겨 20여년 전 마을 회의에서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위해 고목제를 지내기로 결의하려 지금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고목제를 지내오고 있습니다.

1부 행사로는 은행나무 앞에 제단을 차리고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의 안녕과 재해와 질병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해 달라는 제를 지내고 2부 행사는 뒷풀이로 마을 경로당에 모여 주민들 간에 우애와 화합을 다지는 행사로 진행되고 있지요.

최근 3년간은 코로나19로 고목제를 지낼 수 없었지만 올해는 거리두기도 해제되고 고목제를 다시 지내기를 주민들은 고대하고 있지요.

원관원 마을사람들은(이장 임도영) 고목제를 마을축제로 계속 발전시켜 이어갈 것이라고 하며 우리 서수면 지역에 이러한 전통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자부심을 가질만하고 원관원마을 고목제가 서수면의 대표적인 축제로 거듭나길 바란다는 소망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보호수 지정안내판
품격: 읍·면·동나무 / 고유번호 9-17-3-1 / 수종: 은행나무(1본) / 지정일자: 1982년 9월 20일 / 수령: 300년 / 수고: 35m / 나무둘레: 4.0m / 소재지: 군산시 서수면 관원리 204 / 관리자: 서수면장

지면 서수신문 제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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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서수면 사람들(학교)

숲과 더불어 꿈과 끼를 키우는 임피중학교 제73회 졸업식

지난 2023.2.8.(수) 애국지사 춘고(春皐) 이인식 선생의 애국혼과 교육관을 이어받아 '숲과 더불어 꿈과 끼를 키워가는 인권 우호적인 학교'를 만들어 가고 있는 임피중학교(교장 서진용)가 학부모님과 지역기관, 동문회 선배들이 참석한 가운데 춘고관(강당)에서 제73회 졸업식을 가졌다.

이번 졸업식은 그간 코로나19로 인해 학부모를 비롯한 내빈들이 참석하지 못하다가 3년 만에 학부모와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져 더욱 의미가 컸다. 금년에는 13명의 졸업생이 졸업하여 임피중학교는 총 6,76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졸업생들은 졸업증서와 학교에서 수여하는 상 외에도 동문회에서 마련한 총동문회장학재단상, 춘고기념사업회이사장상, 총동문회장상 등을 장학증서와 함께 받았으며, 후배 사랑을 실천하며 졸업생 모두에게 매년 장학금을 주고 있는 32회 졸업생 선배로부터 '32회 장학금'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또한 지역의 각 기관에서는 졸업생을 격려하기 위해 서수면장상(면장 이유청), 서수우체국장상(우체국장 백혁기), 서수환경지킴이회장상(회장 이정란) 등을 수여하였으며, 서수교회(담임목사 전재기)에서는 해마다 장학금을 수여하여 지역과 함께하는 마을교육공동체의 기틀을 마련하는 따뜻한 자리가 되었다.

한편 축사에서 서진용 교장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너가 있음에 내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상극이 아닌 서로를 챙겨주고 살려주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소소한 일상생활에서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당부 말씀과 함께 "여러분은 미래의 주인공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현재의 주인공이다. 지난 3년 동안 새 소리와 숲 향기 가득한 이곳 임피중학교에서 심고 가꾸었던 꿈과 끼를 맘껏 키우고 펼치기를 바라며, 언제 어디서든 존엄성을 잃지 않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대중으로부터 환영받는 임중인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또한 전재기 학교운영위원장은 격려사를 통해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기까지는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보살핌과 은덕이라며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격려하였다.

지면 서수신문 제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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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서수면 사람들

서수면 농촌중심지활성화 사업 공예교실 — 20여 개 마을 머그컵 만들기

2022년 서수면 20여개 마을 머그컵 만들기 공예교실, 주민 참여도 매우 높아

2022년 서수면 20여개 마을을 돌며 머그컵 만들기 공예교실이 열렸다. 마을회관마다 주민들이 둘러앉아 직접 그림을 그려 넣은 머그컵을 완성했고, 주민 참여도가 매우 높아 내년에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모였다.

공예교실이 열린 마을: 내무장마을, 독자개, 석화, 성자마을, 오일마을, 외관원, 용회마을, 운원마을, 하금마을, 하용전마을, 방령마을, 상장곤마을, 신장마을, 아이마을, 외무장, 용성마을, 원용귀, 장자마을, 하장곤마을, 호산마을.

※ 각 마을 사진은 지면 8~9면(PDF)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면 서수신문 제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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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마을 NEWS

마을 NEWS — 동군산농협 조합장 당선, 하금마을 담장 벽화, 신동진 벼 퇴출 논란

동군산 농협 박영근(71) 조합장 당선
지난 8일 전국 동시 조합장선거에 동군산 농협 박영근 씨가 당선 연임에 성공하였다. 당선인 박영근 조합장은 "경쟁력 있는 조합을 만들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며 지역민에게 사랑받는 조합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하용전마을〉
하용전마을 부녀회는 귀농귀촌 마을융화 김장나눔행사를 가졌다.

〈독자개 마을〉 함열여자중학교 교장 취임
독자개마을 출신 이풍길(58. 서수초등/임피중 졸업)씨가 3월 2일자로 함열여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고 합니다.

〈용회마을〉 김덕재씨 국무총리상 수상
용회마을 전 이장 김덕재 씨가 2022년 마을지도자상에 선정되어 국무총리 상을 수상하였다고 합니다.

〈아이마을〉 문병준씨 졸
아이마을에 사시던 서수면 1대 시의원이자 옥구농민항쟁추모회 초대 회장이신 문병준 씨가 향년 88세로 22년 12월 26일 작고하셨습니다.

〈마을탐방〉 하금마을
서수면에서 가장 활기차게 마을 사업을 하금마을(이장 임승우)을 찾아가 보았다. 담장 벽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는 하금마을 사람들, 완성된 소나무 담장그림과 아이들 그림, 마을회의와 동네 청소작업까지 —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마을을 가꾸고 있다.

수확량 많다고 "신동진" 벼 퇴출 — 농식품부 공공비축미에서 제외
우리지역의 대표적인 〈신동진〉 쌀이 사라지게 생겼다. 지난달 농림식품부가 쌀 과잉생산을 막기위해 다수확품종을 공공비축미 매입대상에서 제외하고 종자 공급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서수면에서 40년 동안 벼농사를 짓는 채정병(70세)씨는 맛 좋고 품질이 입증된 〈신동진〉 벼를 퇴출 시키고 수확이 적은 벼를 육성하여 생산을 막아보자는 근시안적인 농업정책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며 수확량이 적어 농가소득이 줄어 드는게 뻔한데 혁신을 강조하는 당국이 이런 비효율적인 정책이나 발표하는 걸 보면 탁상행정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여론에 군산시 의회(의장 김영일)는 "지난해 전북도 전체 〈신동진〉 재배 면적은 6만 ha로 전체 벼 면적의 53%을 차지했고 군산시가 73%에 이른다며 농가소득 증대 차원에서 정부의 우량품종 퇴출 기준을 재검토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지면 서수신문 제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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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교회탐방

서수면 시온교회 김노근(59세) 목사

어느날 한 밤중 외국인 근로자와 마주친 김 목사

가어느 날 유난하게 깜깜했던 한 밤중 교회의 문을 두드리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충전을 해달라고 하는 것 같다. 어느 정도 충전이 되자 그 외국인은 지도를 찾아 GPS로 자기집을 찍어주며 여기가 자기 집 인데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평소에는 핸드폰에 자기 위치를 찾아 다녔는데 물건 사러 나왔다가 밤인데다가 휴대폰이 방전되어 자기집(회사 기숙사)을 찾아 2시간동안 헤메다가 교회 불을 보고 도움을 청하고자 문을 두드렸단다.

2014년 시온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한 이러한 인연으로 다문화 가정을 보살피며 특히 어린 자녀들에 관심이 남달라 편견을 갖지 않고 다 같이 함께 뛰어놀 수 있게 솔선수범하는 목사님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여 탐방 인터뷰를 해 보았다.

우리교회는 다문화 자녀들이 70%을 상회하는 분포를 보이고 있어요 우리마을에도 아기 울음소리가 끊어진지 오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어린이 찾기가 어렵지만 여기저기 입 소문인지 익산지역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어요. 주말에는 운동장에서 놀이터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하고 있습니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고 조금씩 조금씩 시설을 갖추다 보니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 정도는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좁은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어린이 들이 찾아와 놀고 있어 마음 한 편으로는 보람되며 즐거운 마음으로 같이 놀아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야기의 공간인 커피샾을 만들어 지역민과의 유대감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지역은 서수면에서도 외진 곳이라 커피 한 잔 마실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곳이라 교회내에 커피숍을 만들어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 하며 따뜻한 마음의 정을 나눌 수 있어 좋습니다. 언제든지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들렸다 가면 된다고 하신다.

인터뷰 내내 김노근 목사님과 김명숙 권사님은 어릴적부터 뛰어놀던 우리마을이 소외되지 않고 우리가 어렸던 시절과 같은 따뜻하고 사람이 사는 마을이 되었으면 하는 아주 소박한 마음가짐에서 진심으로 우러나는 나눔의 정신이 베여 있음을 느끼며 인터뷰를 마쳤다.

지면 서수신문 제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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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서수 문화

서수면 백제고찰 상주사, 신라고찰 보천사

상주사는 백제 무왕 7년(606년) 세워져

상주사(上住寺)
백제 무왕 7(606년) 신라의 승려 혜공(惠空)이 창건하여 상주사(上住寺)라 하였다고 하나 당시 이 지역은 백제 영토였고 신라와의 치열한 영토전쟁을 벌였던 무왕시대에 신라승려가 창건 하여다고 하니 확실하지는 않다. 1362년(고려 공민왕 11) 혜근(惠勤)이 중창하며 현재 이름으로 바꿨으며 고려말 공민왕이 이 절을 찾아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1641년(조선 인조 19) 취계(鷲溪)가 중수하고, 1762년(영조 38)에는 학봉(鶴峯)이 중수하였다. 오늘날에는 특히 나한 기도 도량으로 유명한데 그 유래가 전한다.

1834년(순조 34) 임피현(臨陂縣) 수령 민치록(閔致祿)이 꿈을 꾸기를 하얀 갓을 쓴 세 사람이 나타나 자신들을 높은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민치록은 세 번이나 같은 꿈을 꾸자 관리들에게 현에 특별한 일이 있으면 보고하라고 하였다. 며칠 뒤 서포(西浦)에 십육나한을 실은 배가 한 척 닿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민치록은 십육나한을 높은 곳에 있는 이 절에 모셨고 이후 십육나한은 많은 영험을 보였다고 한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나한전·관음전·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한 삼존불과 영산회상도, 신중·지장보살·독성·칠성·산신 등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삼존불 위 닫집에는 용두가 조각되어 있는데, 본래는 2기였으나 1기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몰래 가져갔다고 한다. 용마루 위에는 청기와가 2개 얹혀 있으며, 상단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11개의 용두가 놓여 있다.

그밖에 대웅전 안에는 1646년에 제작된 업경대 2기가 있었으나 근래에 도난당하였다. 이 업경대는 거울 중앙의 둥근 구멍에 '순치 2년'이라는 연호가 기록되어 있었다. 하나는 크기가 112cm이고, 다른 하나는 60cm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주사

보천사(寶泉寺)
대한불교조계종에 속한다. 신라시대에 창건하였다고 하나 창건연대는 미상이다. 조선시대에는 유문(有聞) 등이 머물면서 절을 중수하였으며, 민족 항일기에 사세(寺勢)가 기울어진 틈을 타서 일본인이 법당을 매입하여 일본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이때 불상과 불구(佛具)는 숭림사(崇林寺)로 옮겨갔고 절은 폐사가 되었다. 최근에 옛 절터 옆의 언덕에 새 절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우로는 대웅전, 극락전, 요사채, 객사(客舍)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1689년(숙종 15)에 입적(入寂)한 유문의 부도(浮屠)인 축계당사리탑(鷲溪堂舍利塔)과 누구의 것인지를 알 수 없는 부도 2기가 있다. 이 중 축계당사리탑은 옛 절터에서 옮겨온 것인데, 그 때 사리함이 나와서 군산대학 박물관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또한 새로 세운 5층 석탑이 부도 앞에 있다. (출처: 보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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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마을 시

물이 아파하는 소리 · 세모와 네모 · 그리움의 꽃 — 그리고 서랑댕이와 아리댕이

마을 사람들이 쓴 시와 옛 지명 이야기

물이 아파하는 소리 — 석화 최환엽

돌이 물에 슬리우는 소리
물이 돌에 부딪는 소리
밤을 새워
스살 스살 흐억거리다

사람아
아들로 아버지의 매를 맞아 본 적 있으며
아버지로 아들의 종아리에 회초리를 대본 적 있더냐

매를 치고
아버지
그 선한 눈이 젖어
연신 태우는 담배개비 든 손
가늘게 떠시던 모습을 본 아들은
다시는 넘지 않을 천율을 뼈에 새겼다

물이 돌을 때리고
맞은 돌보다
때린 물이 더 아파하는 섬진강 소리를 들으며
아주 오래
뵙지를 못하는 아버지

이른 아침 그 강가에서
나는 가을비처럼 울었다

세모와 네모

사십년전 어느날
세모와 네모는 한 공간에서 살게 되었지요.
세모는
나와 다른 네모가 마땅치 못했고
부딪치고 찌르며
서로에게 상처와 흉터를 남겨 주었죠

상처 위에 딱지가 군살로 여물어 갈 때쯤
피해자는 항상 나라고 생각했던 네모는
세모도 그동안 짬 힘들었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같은 성향의 친구를 만났더라면
네모도 그리 나쁜 친구는 아니었으니까요
노력과 절제속에 서로 다름이 함께했기에
나와 다른 세상이 존재함을 알게 되였고
세모와 네모는 동그라미로 성장했답니다.

그리움의 꽃 — 석화마을 강청호

꽃송이 껴안으면

눈물이 돌까

논둑의 개망초 꽃
바람에 살랑대도

눈물이 돌까

탄식도 강 너울에 흐르며
달빛마저
사랑으로 수런 대더라

파란 서슬에 놀래
꽃은
제 홀로 수런 대더라

서랑댕이와 아리댕이

그 옛날 서수 사거리는 "서랑댕이"라 불렸고 아이리(아이마을)는 "아리댕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서랑댕이는 서낭당이 근처에 있어서 서낭(랑)댕이라 불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어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 만경이남 사람들은 과거보러 만경나루를 건너 서랑댕이를 지나서 워메장터(현 가자터 뒤에 워메장터가 있었다 함)에 들러 허기를 달래고 금강 화게나루에서 서울로 향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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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마을 사람들

색칠공부로 뇌건강 치매예방을

외무장마을 노일순(88세) 어르신

서수면에 사시는 어르신께서 취미로 뇌 건강에도 좋고 치매 예방에도 좋은 그림그리기를 하신다기에 마을신문 기자단이 취재해 보았습니다. 외무장 마을에 사시는 노일순(88세)는 거실에서 그림책을 펼쳐 놓고 열심히 색칠을 하고 있었고, 거실 한 쪽에는 지금까지 완성한 것으로 보이는 그림책이 수북히 쌓여 있었습니다.

어르신 그림그리기를 좋아 하시나 봐요. 옛날에 시집 오기 전에 그림을 잘 그리셨나요?

아니지라 그런게 아니고 한 겨울에 일도 못하고 소일 거리도 없는데 우리 애들이 건강에 좋다고 그림책을 한 보따리 사와서 조금씩 하다보니까 재미있기도 하고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하다 본께 이렇게 많이 했지라.

할머니 할머니는 언제부터 혼자 되셨나요? 그리고 자제분들 몇이나 두셨고요?

응 긍게 우리 바깥 양반은 일 하다 심장마비로 내가 48세 때 저 세상으로 가버렸고만. 아들 둘에 딸 셋을 끼우느라 참 힘들었제 고생헌걸 말 할 것 같으면 말로는 다 못허지. 근디 인제 다들 잘 되야서 괜찮혀 다들 밥벌이 잘들 허고 있응게..

어르신 혼자만 하시지 마시고 동네 어르신들과 같이 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응 그래서 나도 몇 번 이야기 해 보았는데 잘 안되네. 이번에 경로당이 생기면 한 번 더 같이 해보자고 할려고.

예 어르신 고맙습니다. 오래 오래 건강 하세요!! 인터뷰를 마치자 셋째 딸 김은정(56) 사위 최문섭(63)가 어머니를 뵈러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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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 환경

서수 교차로 쓰레기줍기 행사, 마을청소도

농촌중심지활성화 사업팀과 서수환경지킴이 — 아이마을도 정기적으로 마을청소를 하기로

서수면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 운영위원회와 서수면 환경지킴이는 지난 3월 11일 서수면 오거리에서부터 군산 익산 간 고속화도로 교차로까지 '쓰레기 줍기 행사'를 개최하였다.

또한 같은 날 아이마을(이장 이운기)도 오전 마을 쓰레기 청소를 실시하였다. 아이마을은 정기적으로 마을 쓰레기 청소를 실시하기로 하고 15여명의 마을 주민이 동참 쓰레기장 청소를 하였다.

이날 행사에는 서수환경지킴이 이정란 회장과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 최연호 운영위원장을 비롯 이종화 부위원장 백혁기 우체국장등 20여명의 회원이 참여 도로변에 널려져 있는 비닐 등 쓰레기 줍기 행사를 진행하였다.

한편 쓰레기 줍기 행사를 마친 서수환경지킴이 이정란 회장은 마을이 깨끗해야 외부 사람들이 찾아 온다며 우리 마을은 우리가 청소한다는 슬로건으로 매월 정기적으로 청소하는 날을 정해 일제히 청소하는 서수면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홍보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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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기고

새만금 시대, 마한 메가시티를 만들어야

새만금 영토분쟁을 끝내고 도래하는 서해안 시대를 준비하는 지역 발전과 국가 경쟁력 강화에 전북 특별자치도 시작과 함께 민관은 민첩하게 대응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존의 행정적, 경제적 경계를 넘어서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접근이 있어야 하는 데 본 안은 익산, 군산, 김제, 부안을 통합하여 메가시티를 창설함으로써 지역 발전을 가속화하고,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새만금에 특례시를 만들어야 한다.

각 도시 간 경제적 연계를 강화하여 산업의 다각화와 경제 규모의 확대를 이룰 수 있는 통합 메가시티는 투자 유치와 고용 창출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며, 지역 내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인프라 통합 및 효율화 차원의 교통, 통신, 공공 서비스의 통합을 통해 서비스의 질을 향상하고,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가능하게 하며, 이는 시민들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하는 동시에 지속 가능한 도시 발전을 촉진할 것이다.

메가시티 구축을 통해 환경 보호 및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 달성에 더욱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대규모 통합 프로젝트를 통해 친환경 인프라와 기술의 도입을 가속화하고, 생태계 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통합 거버넌스 구축은 각 지역의 대표와 전문가로 구성된 통합위원회를 설립하여, 통합 과정의 방향성과 정책을 결정하고 경제적 통합 전략 수립하여 통합 메가시티의 경제적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산업 클러스터 구축, 창업 및 혁신 촉진, 그리고 국제 무역과 투자 유치 전략을 수립하여야 한다. 또한, 지역 내 소득 불균형 해소와 사회적 포용성 강화에 중점을 둔다.

통합된 교통 시스템 구축으로 공공 서비스의 효율적 관리 및 디지털 전환 가속화를 목표로 하여 시민들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대폭 향상할 수 있고 지속 가능한 자원 관리, 그리고 생태계 보호를 위한 정책과 프로젝트를 실시하여 통합 메가시티는 환경 보호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는 전략으로 가야 한다.

네 개의 도시와 군을 통합한 메가시티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전략적 결정으로 경제적 번영, 사회적 포용성, 환경적 지속 가능성을 모두 달성하는 혁신적인 도시 모델이 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지역의 발전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미래를 위한 중대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필자는 네 개의 시 군을 통합한 이름은 마한시(마한 특례시)로 하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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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기고

지역 상생과 ESG, 미래를 위한 협력의 길

우리 서수면은 지금,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특히, 지역 경제의 활성화와 환경 보호,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시점에서, 비영리법인 단체법인인 (사)서수면 사람들이 제시하는 ESG(환경, 사회, 지배 구조) 기반의 지역 상생 협업 모델을 제안해 본다.

지역 사회와 기업이 상생하는 이 모델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 추구를 넘어,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환경 보호, 사회적 가치 창출을 목표로 한다. 기업의 자본과 기술, 네트워크를 지역의 잠재력과 결합시킴으로써, 양자 간의 상호 이익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의 번영을 도모하는 것이다.

지역 특성을 반영한 사업 개발은 이 협력 모델의 핵심이다. 예컨대, 농업 중심의 지역에서는 유기농 제품의 생산과 판매, 친환경 문화 관광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이러한 사업은 지역의 자연 환경을 보호하고, 지역 주민에게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ESG의 가치를 실현한다.

또한, 협력을 통한 지역 인재 육성과 고용 창출은 지역 사회의 장기적인 발전을 보장한다. 기업과 지역 사회가 함께 교육 프로그램과 직업 훈련을 지원함으로써, 지역 청년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하고, 지역 경제의 성장 엔진을 강화한다.

이 모델의 성공은 지역 사회와의 소통에 달려 있다. 정기적인 대화와 사회 공헌 활동을 통해 지역 주민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요구사항을 사업 계획에 반영함으로써, 지역 사회와 기업은 진정한 파트너십을 구축할 수 있다.

지역 상생과 ESG를 기반으로 한 협업 모델은 단순히 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다. 이제는 모든 이해관계자가 함께 이 길을 모색하고, 실행에 옮길 때이다. 우리의 미래는 이러한 협력과 혁신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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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사회

환경교육 실시 — 서수초·임피중학교 대상

서수환경지킴이(회장 이정란)는 지역 서수초등학교와 임피중학교에서 환경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이 프로그램은 환경을 보호하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려는 목적이다.

학생들은 환경 보호의 중요성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배운다. 교육은 재미있는 활동과 토론으로 이루어져 있어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서수 환경 지킴이의 이정란 회장은 "아이들에게 환경 교육을 함으로써 미래에 더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학교에서는 이 프로그램이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학생들은 환경에 대해 더 배우고 싶어하며, 집과 학교에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앞으로 더 많은 학교로 확장될 예정이다. 서수 환경 수호자는 이 교육이 아이들을 환경 보호의 중요한 참여자로 만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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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마을 소식

전북KBS에 불우이웃돕기 성금 — 아이마을 주민들

아이 마을(이장 이운기) 주민들이 지난 1월 31일 명절을 맞아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모금을 통하여 전북KBS를 통해 기부하였다. 이 행사는 지역 공동체의 단합과 상호 지원을 목적으로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이번 모금 행사를 통해 우리 마을의 연대감과 공동체 정신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고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기부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며

이 행사는 마을 주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으로, 지역 사회의 강한 결속력과 기부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주민들은 이번 행사를 계기로 앞으로도 지역 사회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계획이다 라고 이운기 아이마을이장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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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마을 소식

설날을 밝히는 따뜻한 마음 — 독거노인을 위한 선물 나눔 행사

설날을 맞이하여 지역 사회가 더욱 따뜻해졌다. 이번 명절에는 독거노인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전달하기 위한 나눔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 사단법인 서수면사람들이 바자회 고무신등을 팔은 수익금을 사용하여 마련되었으며,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이 행사는 지역 사회 단체와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기획하고 진행했다. 그들은 설날을 맞이하여 독거노인들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번 나눔 행사를 준비했다고 전하며, 행사를 통해 준비된 선물을 통해 노인들이 명절의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사)서수면사람들 임원들은 선물을 직접 포장하고, 대상자의 집을 방문하여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자원봉사자들은 독거노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소통은 독거노인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으며, 설날의 의미를 더욱 빛나게 했다.

이 행사에 참여한 이종화 부위원장은 "이번 선물 나눔 행사를 통해 독거노인분들이 명절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며, "작은 선물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온정을 전달할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전했다. 또한 최연호 위원장과 이정란 사무국장은 서수면에 거주하는 다문화 가정을 방문하여 서수면 주민으로 잘 살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앞으로 서수면사람들 일원이 되어 정보도 공유하며 베트남 식품 개발등 앞으로 농중활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여 확답을 이끌어 냈다.

(사)서수면사람들 최연호 이사장은 "모인 수익금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어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사회적 약자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설날 나눔 행사는 지역 사회의 따뜻한 마음을 모아 독거노인들에게 큰 기쁨과 행복을 선사했다. 앞으로도 이러한 나눔 문화가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더 많은 이들이 따뜻한 명절을 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지면 서수신문 제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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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서수 문화

"사람이 찾아오는 마을" 프로젝트로 지역 활성화에 앞장

농촌활성화사업 (사)서수면 사람들은 "사람이 찾아오는 마을"을 목표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공동체의 연결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도입할 예정이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의 자연 환경과 문화 자산을 활용하여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매력적인 마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업 계획에는 지역 특산품 개발, 관광 명소 조성, 문화 이벤트 개최 등 지역의 경제적 가치를 높이고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포함되어 있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지역 주민들과의 협력에 있다. 사업계획은 지역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그들의 아이디어와 노력이 프로젝트에 반영될 수 있도록 설계되고, 이를 통해 지역 공동체가 하나로 뭉치고, 지역에 대한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이 프로젝트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며, 친환경적인 관광 개발과 지역 특산품 생산에 초점을 맞추어, 경제 활성화를 추구하면서도 환경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지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사업을 주도하는 서수면 사람들 대표(최연호)는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과 함께 성장하고 발전하는 지속 가능한 마을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를 통해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살고 싶은 마을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고 전했다.

이 사업 계획은 지역 주민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기업과 단체들과도 정보를 공유하며 자매결연을 통한 상호간 방문, 나아가 해외 단체들과도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역동적인 지역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지역 경제와 문화를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중요한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면 서수신문 제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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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마을 시

가슴에 내리는 빗소리 · 울엄마

가슴에 내리는 빗소리 — 이정란

주르르 주르르
쏟아지는 빗소리
겨울 빗소리

그쳤다 이어지고
또 그쳤다
또 이어진다

빗속을 뚫고
미친듯이
달려본다

흐느낀다
매마른 가슴이
찢겨지는 소리

부지직 부지직
통증없는 상처가
더 아프다

흐느낀다.
하늘도 함께
운다

울엄마 — 박희은

동이트는 아침이면
나팔꽃이 줄을 타고
올라가 해맞이 합니다
처마밑 채송화도 잠에서 깨어
활짝활짝
피어나지요

울밑에선 봉선화가
붉게 물들고
꽃사과는 주렁주렁
익어갑니다

포도나무 잎새에
숨어있는 풀벌레는
가을마중 나와있는데
어쩌려고 철없는 꽃사과는 이 염천에
꽃들이 마구마구
피어나는지
울엄마 닮은 하얀 낮달만 웃고
있네요

넓은 들판에는
푸르른 벼잎들이 사그락사그락
살찌우는 소리로 요란한 이즈음
아버지 살아생전에
마당에 말리던 고추가 돌아눕는
시간이라고 하셨을 정도로
뜨거운 한낮에 울엄마는 오수에
들고
창밖에
흘러가는 흰구름에
마음실어 소소한
시골 정취를 올려봅니다

엄마는
딸도 몰라보시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이곳에 살아 계셔서 참 좋다.

지면 서수신문 제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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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서수 소식

(사)서수면사람들 설립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운영위원회는 23년 8월 사단법인서수면사람들 창립총회를 열고 같은 해 9월 전북도 설립인가를 마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비영리단체인 사단법인 서수면사람들은 회원수 100여명으로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운영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단체로 서수면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을 계승하고 서수면 문화경제복지를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지역활성화을 위한 단체로 거듭나기로 결의한바 있다.

사단법인서수면사람들 이사장은 최연호(용성마을)씨가 사무국장은 이정란(하용전)씨가 책임을 맡고 있으며 이들은 서수면발전을 위해 모든역량을 동원하여 서수면이 활성화될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주요 이사로는 부이사장 이종화씨 문화담당 이하범씨 농업담당 채정병씨 기획담당 백혁기씨 등이 함께하고 있다.

지면 서수신문 제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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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서수 소식

서수면 인공지능(AI) 주민교육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이하 농활사업) 일환의 하나로 지역 사회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인공지능(AI) 기초 교육 프로그램을 열악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발표했다. 이 프로그램은 지역 사회 내에서 디지털 기술의 이해와 활용을 촉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사단법인 서수면사람들이 주최한 이 교육 프로그램은 AI 기술의 기본 원리와 일상생활에서의 응용 방법을 소개하는 코스로 구성되었다. 참가자들은 AI가 어떻게 데이터를 처리하고 결정을 내리는지, 그리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배웠다.

특히 컴퓨터 과학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했다. 참가자들은 AI의 개념, 기계 학습, 자연어 처리, 로봇공학 등에 대한 입문 수준의 강의로 이루어졌다.

"이번 교육은 우리 지역 사회에 AI 기술의 중요성과 잠재력을 알리는 데 중점을 두었고, AI 기술이 우리의 일상과 업무에 점점 더 많이 통합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 참가자는 "이번 교육을 통해 AI에 대한 두려움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며, "앞으로 기술이 우리 삶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더 배우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번 교육 프로그램은 AI 기술에 대한 지역 사회의 인식을 개선하고, 디지털 능력 강화를 위한 첫걸음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서수면사람들은 앞으로도 지역 사회의 디지털 전환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면 서수신문 제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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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활성화 사업

서수 여성 의류 바자회

서수면 작은 시작에서 큰 변화로

(사)서수면사람들은 무궁화문화센터 북카페에서 이웃돕기 여성의류 바자회를 성황리에 마쳤다고 밝혔다. 이 바자회는 주식회사 오키(대표 이윤설)가 서수면사람들의 사업취지를 공감하여 기부한 4톤 트럭 한대분의 옷으로, 품질이 우수하여 성황리에 바자회를 마칠 수 있었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바자회장에는 주민들이 직접 꽃을 그려 넣은 고무신도 함께 내놓았으며, 수익금은 설날 독거노인 선물 나눔에 쓰였다.

지면 서수신문 제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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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서수면사람들

미용의 손길로 따뜻함을 — 고령의 어르신들께 새로운 봄을 선사

80세 이상의 고령의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미용 봉사 활동을 펼치며 지역 사회에 따뜻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사)서수면사람들(사무국장 이정란)은 노인 복지 향상과 외모를 통한 자신감 회복에 중점을 두고, 어르신들에게 무료로 미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벌써 수차례 이어진 봉사 활동은 서수 지역의 다양한 노인 복지 시설과 협력하여 진행되었으며, 전문 미용사들로 구성된 봉사단이 어르신들의 헤어스타일을 가꾸어드리고, 기본적인 피부 관리 서비스를 제공했다. 봉사단은 어르신들의 외모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살펴, 이들이 사회의 소중한 구성원임을 느끼도록 돕고 있다.

단체 사무국장 이정란 씨는 "많은 어르신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스스로를 돌볼 기회가 줄어들고,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약해지는 것을 느낀다"며, "우리의 미용 봉사가 어르신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그들이 더 밝고 활기찬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이번 봉사 활동에 참여한 한 어르신은 "오랜만에 거울을 보며 자신감을 느꼈다"며,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매우 감사하다. 우리 같은 고령자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이 정말 고무적"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서수 지역사회는 이러한 봉사 활동이 어르신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 단체의 노력이 더 많은 자원봉사자들과 후원자들을 끌어들여 지속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이 미용 봉사 활동은 단순히 외모를 가꾸어 주는 것을 넘어, 세대 간의 교류를 촉진하고, 어르신들이 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하는 중요한 사회적 활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서수 지역사회는 이러한 따뜻한 손길이 어르신들에게 새로운 봄을 선사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서수면미용봉사는 미용 전문기술을 가지고 있는 현선자(문화마을)씨를 비롯하여 김정옥, 김성애, 박희은, 한연순, 이차란, 김밈선, 김경희, 신화옥, 문연희씨 등이 참여하고 있다. 봉사가 이루어진 곳: 아이마을, 용성마을, 용회마을, 외무장마을, 내무장마을, 성모요양원.

"고마워! 또 해줘!" — 어르신들의 한마디.

지면 서수신문 제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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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활성화 사업

공방 수업 — 서수 지역, 교육과 문화의 결합으로 지역사회 활성화에 앞장서

서수면 농촌 활성화 사업의 일환인 (사)서수면사람들은 서수 지역이 교육, 문화, 그리고 식품 개발 사업을 통합하여 지역사회의 활성화와 경제 발전에 새로운 동력을 주입하고 있다. 공방 수업, 인공지능 교육, 예술제와 더불어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식품 개발 사업이 주목받으며, 지역의 다양성과 창의력을 강조하는 동시에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서수면의 공방 수업에서는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수공예품 제작을 가르치며, 인공지능 교육은 농업과 식품 개발에 적용할 수 있는 최신 기술을 소개한다. 예술제는 지역 식품을 주제로 한 예술 작품 전시와 더불어, 지역 식품 개발자들과 협력하여 개발된 신제품의 시식회를 마련했다.

식품 개발 사업의 핵심은 지역에서 재배된 농산물을 이용하여 건강하고 혁신적인 식품을 제조하는 것이다. 이 사업은 지역 농민들과의 긴밀한 협력 하에 이루어지며, 지역 농산물의 가치를 높이고, 농민들의 소득 증대에 기여하고 또한,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식품 개발은 지역 경제의 다각화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 한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과 사업 참여자들은 이러한 통합적 접근 방식이 서수 지역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고, 지역사회를 더욱 활기차고 연결된 공동체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식품 개발 사업을 포함한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우리 지역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주민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지역사회의 발전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습니다."라고 한 참여자는 말했다.

서수 지역의 이러한 노력은 지역사회를 활성화시키고, 주민들에게 지속 가능한 발전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다른 지역사회에도 영감을 주고 있다. 교육, 문화, 식품 개발의 결합은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모델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공방에서는 꽃을 그려 넣은 고무신, 도마와 상자에 그린 목련과 장미, 꽃 도안을 찍은 티셔츠와 앞치마 등이 만들어졌다. 또한 서수면사람들은 군산대학교·호원대학교와 함께 서수 농산물을 활용한 농식품개발 산학연 연구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면 서수신문 제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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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내려오는 이야기

수시제 이야기 — 노성식 어르신 인터뷰

이 마을에서 나서 구십사 년

조사자: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성식: 내가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이 마을에서 나서 구십사 년을 쭉 살아왔으니 아는 대로 이야기 해 줄게

조사자: 원용귀 마을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것이 있나요?

노성식: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을 신용귀 마을로 분가를 시켜서 큰 동네가 되었어. 돌아가신 노긍식씨 집안이 잘살았거든, 그러니 노가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지는 나도 모르지만, 이곳에 터를 잡고 살다가 자식들을 중용귀까지 분가시켰고 그 집안에서 땅을 내놓아 마룡 국민학교가 생겼지.

조사자: 아 그렇군요. 좋은 일을 하셨네요.

노성식: 암 좋은 일이지. 그리고 이 마을에 귀룡청수의 명당자리가 있다는데 그 자리가 노긍식씨의 집 뒤야! 그래서 집안 조상들의 선영을 그리로 이장을 하였지. 거기서 보면 수시제가 바로 보이는데 그 방죽 물이 청수에 해당한다네 옛 어르신들의 말로는 수시제 때문에 명당의 발목을 받게 될 거라고 하더구먼

조사자: 그렇군요. 수시제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나요?

노성식: 그 뭐냐 옛날에 수시제 그 아래 넓은 들을 그 물로 농사를 지었어! 70년대 초까지도 요 앞 수시천에는 참게나 물고기들이 엄청 많았는데 지금은 농지정리가 되고 농약 때문에 물고기 씨가 말랐지만 송사리부터 붕어 잉어 장어 미꾸라지 등이 부지기수로 있었지. 어쨌든 수시제에 용이 살았는데 어느샌가 용이 나가고 가뭄이 들어 흉년이 들었어. 그래서 마을에서 풍장을 치고 제물을 장만하여 기우제겸 하천제를 지낸 후에 나갔던 용이 들어 왔다고 해. 그 뒤로 풍년이 들고 잘살았 데. 그래서 용이 되돌아왔다고 해서 용귀리 라고 불렀다나.

조사자: 그런 일이 있었군요

노성식: 그리고 이건 내가 직접 겪은 일인데 도깨비불이라고 있었지. 날궂이 날에는 저 넓은 들에 도깨비불들이 볏가리처럼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여 무섭기도 하였지. 그전에는 소를 잡지 못하게 하였어! 해방 직후 술 먹을 때 귀중이네 집에서 새벽에 몰래 소를 잡기로 하였는데 마룡초등학교 뒤쪽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죽었는데 그때는 톱 같은 연장이 없어, 그래서 화목으로 쓰려고 베려 해도 못 베고 있는 거야 우리 큰집에 마침 큰 톱이 있어 그걸 빌려다 새벽에 남들 눈에 안 띌 때 비는데 커다란 혼불인가 도깨비불인가 하는 것이 저 넘어에서 넘어오더니 상구씨 집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있다 나오더니 장곤리 공동묘지 쪽으로 나가더라고 그 뒤로 사흘 만에 앞에서 말한 대로 귀중이네 집에서 소를 잡는데 소피가 몸에 좋다고 하니 허니 상구씨가 소피를 먹었는데 목에서 소피가 엉기었는지 그분이 돌아가시었어! 그런 일이 있었지 암 있었지

조사자: 오늘 여러 말씀 감사합니다.

지면 서수신문 제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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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내려오는 이야기

뿌리 깊은 마을 — 용(龍)자 붙은 마을이 많은 까닭

우리고장의 지명유래

서수면에는 용룡자(龍)가 붙은 마을이 유난히 많은데 용회(龍回) 용전(龍田) 용성(龍成) 마룡(馬龍) 용귀(龍歸) 신용귀(新龍歸) 등이 그것이다.

용귀마을에 얽힌 유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보기로 한다. 용은 본래 수원과 관계가 있고 또 그 산 모양이나 명당의 일컬음으로 연유하여 지명으로 쓰인 경우가 많은데 서수면 마룡리 용귀마을도 그와 같다. 용귀는 수시제(水柴堤)와 회룡은산형(回龍隱山形)의 명당을 말함이 바로 그것이다.

마룡리는 용귀마을 원용귀(元龍歸) 장관리(長串里)는 상장관(上長串) 하장관(下長串) 등이고 옥하리(玉下里) 등이 거기에 따른다. 이 중 장관리는 산의 모양이 들안으로 깊이 뻗어 골(岬=갑)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붙여 진 것이고 「상장관」 「하장관」은 마을이 커지면서 위 아래뜸으로 부르다가 갈라 이름한 것이다.

마을의 형성연대는 마한시대(馬韓時代) 때부터 인간이 거주하였다고 추정한다.

원래 여기는 임피현 남이면인데 원 산줄기는 함라 뒤 함라산과 원관원의 옥녀봉 그리고 나포의 축성산의 여러 줄기가 여러 곳에서 이르러 한 가지와 같은 줄기의 끝부분을 이룬 곳이 이 「용귀마을」과 「장관리」의 위치이다.

「용귀」는 귀룡천수(歸龍穿水) 다시말하면 용이 물을 털어내는 형국으로 용이떠나지 않고 머물으니 좋은 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 이 마을은 옛부터 수원이 좋아 수리시설이 근대화되기 이전에도 그리 고통을 격지 않고도 농사를 잘 지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어느 곳이건 파기만하면 물이 나와 아무리 가물어도 물걱정을 한적이 없고 논베미에도 물을 잡기가 수월해서 어지간한 가뭄에도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수시제의 수호와 풍년을 기원하는 하천제를 정성껏 지냈더니 수시제에서 달아났던 용이 다시 돌아왔다는 전설에서 용귀리(龍歸里)라 호칭하였다' 한다

옥하리는 다른 이름으로 수리(水里)라고도 부르며 그래서 인지는 모르나 이 마을 아래쪽에는 옥하제(玉下堤)가 있는데 이 방죽은 꽤 나 오래된 방죽이고 제방이 그리 높지는 않아도 물은 항상 넉넉하게 잡을 수가있다. 과연 용귀천수(龍歸穿水)나 수시제(水柴堤)라 할만하다.

옥하리 즉 수리에는 갈마교(葛馬橋)가 하나 있었다. 지금은 논두렁 길만으로도 아무데고 갈 수 있어졌지만 옛날엔 다리가 없이는 용귀마을과 옥하마을이 서로 내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개울은 장관리를 거쳐 임피 슬산을 거쳐 멀리 대야를 거쳐 만경강 깊숙이 떨어졌던 큰 개울이었다. 이 개울의 수원은 멀리 익산에서 시작되나 용귀에 이르러 갑자기 많아져 커졌다는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수원이 넉넉했던 용의 마을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용과 말과 관계 된 이름은 산의 형세가 말형으로도 보았기 때문인데 갈마교의 갈마(葛馬)는 갈마음수(葛馬飮水) 즉 말이 물마시는 모양의 말에서 따온 이름이다. 물이 얼마나 많았으면 말이 물마시는 형국을 상상했을까 차근차근 생각해 볼만 하다. 그리고 옥하리에는 옥(玉)씨가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데 옥(玉)자의 인연은 우연이라 할 수만은 없다.

이 근방 마을의 생활권은 임피현에 속해 있으면서도 황등(黃登)이었다. 장이 임피읍과 황등에 다같이 섰으나 가까운 임피장이 아니라 황등장을 택했다. 이것은 옛부터 황등장이 훨씬 컸고 거래하기가 용의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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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내려오는 이야기

"쥐좃도 모른다"는 말의 유래

군산 구비문학 설화

'쥐좃도 모른다'라고 허는 소리가 있잖여. 쥐좃도 모른다 라고 안혀? 쥐좃도 모르는 놈이 쥐좃같이 지랄헌다고 하잖여. 어째서 쥐좃도 모른다는 소리가 나왔는가는 메누리(며느리)게서 나온 소리여.

어떤 사람이 아들이 한 몇 명이 돼는디 아 인제 아들도 얻고 편허게 살려고 이리저리 돌아 다닌다고 다디다 본게, 다리밑에서 쥐란놈 하나가 해골바가지 하나를 갖다가 놓더니 지발로 딱딱딱 긁더니, 대가리에다 써보고 멧번을 그러능겨 쥐란놈이 저렇게 좋은 재주가 있나 허고는 해골바가지를 갖다가 머헐러고 근다냐? 그러고 있는디 아 이 쥐란놈이 발로 꼬작꼬작 허더니 대갈박에 맞는가 안맞는가 써보고 또 써보고 떡 맞응게 점잖은 영감으로 딱 변해가지고는 터벅터벅 다리밑에서 올라왔단 말여.

희한하여 영감이 된 쥐란놈을 졸래졸래 따라가봉게, 저그집으로 들어가 쥐란놈이 그런디 아들놈이 나와서 "아 아버지 어디를 갔다오쇼잉" 하다못해 할멈도 "아이 영감 인제사 오쇼 어이 들어오쇼" 저그 아버지가 화가 잔뜩나 어찌 쥐보고 그냐고 그런게 어떤 미친 영감이냐고 할멈도 때리고 아들놈도 때리고 하여 진짜 아버지를 쫓아낸겨.

그런게 영감이 올디가 갈디가 있는가 마누라도 안 붙여주고 며느리도 아들도 아무도 붙여주질 안혀 근게 거지가 돼서 얻어먹고 대니네, 저 냇가에서 오두막 집을 짓고 거기서 밥을 얻어 먹고 댕겨. 쥐란놈은 아들한테 메누리한테 대우 받고 마누라허고 잠자고 살어.

영감은 어디도 붙여주덜 안헌게 오도갈디가 없고 한 일이년 그지그지 상거지가 되었는디 한 번은 밥을 얻어 갖고 오닌게 아 괭이 한 마리가 씨러저서 물에 떠내려와 금방 죽게 생겨거든, 그런 괭이를 딱 건져내 살려 놓았어. 밥도주고 어쩌고 헌게 괭이가 살아서 둔갑하여 사람이 되얏어. 그것도 여자가 되얐어 그래서 같이 밥을 얻어먹고 살어 시방.

근디 한번은 "어째서 당신은 거지가 돼있오?"라고 각시가 된 괭이가 물어 그래서 쭉 이야기 헝게 귀앵이가 생각허더니 내가 영감을 살려주리다. 오늘 저녁은 자고 내일은 가서 그 집을 들어가쇼 글고 처 자식 다 불러놓고 시비를 거시오.

"저그 아버지 있는디,,,," "이놈아 내가 기지 저놈이 기냐? 어떤 놈을 데려 놓고 이 야단을 허냐. 내가 니 애빈가 저게 니 애빈가 보믄 알겨 아녀" 그러더니 귀앵이 한 마리를 떡허니 품안에서 내려 놓은게 괭이란놈이 달려가 맥아지를 꽉물어 죽여놓고 보닌게 큰 놈의 쥐거든. 어이가 없어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메누리가 헌 소리여 "어머니는 쥐좃도 모르고 사람좃도 몰라요?"

허허허 메누리가 시어머니 한테 쥐좃도 모르냐고 헌 말여 그래서 거시기헌 사람보고 쥐좃도 모르냐고 허는거여

지면 서수신문 제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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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 내려오는 이야기

왈운정 은행나무의 전설

옛날 연대나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 은행나무는 아주 옛날부터 자생하고 있는 듯합니다.

서수면에 있는 왈운정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현감 벼슬을 임명받고 임피 고을로 부임 행차하게되면 임피 관아 고을에서는 첫 번째 관문인 왈운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에 정자를 세워 원님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정자가 어찌 정교하고 구름에 오색영롱하여 아름다웠던지 왈운정이라 명명하고 칭송하게 되었답니다.

어느날 구관 사또가 가시고 임금님 명에 따라 신관 사또가 고을 원님으로 집무하게 되었는데 옛날에는 관아의 현감이면 백성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가 원님의 자리였습니다.

새로운 신관 사또는 세전도 과하게 메기고 백성들의 노동력 착취는 다반사 였고 어찌나 포악한 원님이었는지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먹을 것이고 뭣이고 마음 내키는 대로 착취하였답니다.

한편 인근에 수백 년간 서 있는 은행나무에 은행이 많이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이방에게 올해부터 은행 3석을 바치라는 엄명이 하달되었다고 합니다. 이방은 아연실색하여 주민들과 협의하였으나 우수순풍 하여 풍년이 된다고 하여도 3석의 수확은 불가능하여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해부터 이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한 톨도 열리지 않았답니다.

원님한테 매년 닥달당하느라 자나 깨나 걱정은 이방과 마을 주민이었지만 원님에게 볼기를 내줄지언정 어찌할 방도가 없었답니다.

이렇듯 세월이 어언 3년째 흘렀고 포악한 원님이 바뀌고 인자한 새 사또가 부임하게 되었답니다.

그러자 그 해부터 은행이 주렁주렁 열리고 구 사또를 원망하면서 새 사또를 칭송하게 되었답니다.

지면 서수신문 제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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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천년의 미(米)》 제1회

쌀도 고향이 있는 법이여

― 서수 들판에 묻힌 백 년의 약속

2026년 늦가을.

서수 들판은 온통 황금빛이었다.

벼를 베어낸 논과 아직 추수를 기다리는 논이 들판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남아 있는 벼들이 몸을 낮추었다가 다시 일어섰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황금빛 물결이 천천히 들판을 건너가는 것 같았다.

해원은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에게 이렇게 넓은 논은 낯설었다.

“할아버지.”

“왜?”

“저게 다 쌀이에요?”

할아버지가 웃었다.

“벼여.”

“벼?”

“논에 있을 때는 벼고, 껍질을 벗겨야 쌀이 되는 거여.”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들판으로 눈을 돌렸다.

“먹는 건 쉬워도 키우는 건 복잡혀.”

그 말에는 이상하게 긴 시간이 들어 있었다.

해원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볏짚 냄새와 흙냄새가 마당까지 밀려왔다.

할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들판을 바라보았다. 해원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렇게 둘이 나란히 앉아 있자 오래된 집의 마루와 마당, 그리고 그 너머의 들판이 마치 한 장의 오래된 사진처럼 고요해졌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원아.”

“네?”

“이리 와 봐라.”

할아버지는 마루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오래된 마루판 하나를 손으로 더듬었다.

해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거기 뭐가 있어요?”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루판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천천히 들어 올렸다.

끼익.

낡은 나무가 긴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마루 아래는 어두웠다. 할아버지가 몸을 숙여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뒤 먼지가 잔뜩 묻은 철제 상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는 오래되어 붉게 녹슬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할아버지가 상자 위에 쌓인 먼지를 손으로 털었다.

“아주 오래된 거여.”

“얼마나요?”

“나보다도 오래됐지.”

해원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올라왔다.

안에는 누렇게 변한 종이들과 작은 사진 몇 장, 빛이 바랜 기록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귀퉁이에 작은 천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매듭을 천천히 풀었다. 해원이 몸을 가까이했다.

주머니 안에는 검게 변한 볍씨 몇 알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볍씨다.”

해원이 웃었다.

“이렇게 까만 게요?”

“세월을 먹어서 그런 거여.”

할아버지는 볍씨 한 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해원에게는 그저 작고 마른 씨앗일 뿐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눈빛은 달랐다. 그는 볍씨를 오래 바라보았다. 마치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쌀도 고향이 있는 법이여.”

해원이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쌀에도 고향이 있어요?”

“있지.”

“어디요?”

할아버지가 마당 너머를 가리켰다.

“저 들판.”

해원은 다시 서수 들판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과 똑같은 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 볍씨도 저기서 나온 거예요?”

할아버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상자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색은 누렇게 변했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종이에는 삐뚤삐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해원이 읽어보려 했지만 글씨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누가 쓴 거예요?”

할아버지가 말했다.

“복순이라는 사람이 썼다.”

“복순?”

해원에게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우리 가족이에요?”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했다.

“가족이기도 하고…… 이 들판의 사람이기도 하지.”

해원은 더욱 궁금해졌다.

“무슨 뜻이에요?”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종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사람들의 숨결이라도 남아 있는 듯했다.

1900년대 초.

이 들판의 쌀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군산항에는 쌀가마가 산처럼 쌓였고, 들판에는 농민들이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땅의 주인은 바뀌어 갔고 농민들은 자신이 지은 쌀을 마음대로 먹을 수도 없는 세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아이들은 태어났고 사람들은 사랑했고 농부들은 씨를 뿌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다.

이 땅의 쌀은 누구의 것인가.

할아버지가 철제 상자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해원이 사진을 받아 들었다.

“이 사람이 복순이에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럼 누구예요?”

“옥례.”

처음 듣는 이름이 또 나왔다. 해원은 사진 속 여자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빛이 바랜 사진 속에서도 여자의 눈빛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옥례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천천히 말했다.

“모든 이야기는 그 사람에게서 시작된다고 해야겠지.”

그 순간 바람 한 줄기가 마당을 지나갔다. 마른 볏짚이 서로 부딪히며 사각거렸다.

할아버지는 다시 손바닥 위의 검은 볍씨 한 알을 바라보았다.

작디작은 볍씨 하나.

그러나 그 씨앗에는 한 가족의 기억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살아온 세월, 나라를 빼앗긴 시대, 쌀을 빼앗긴 농민들의 눈물, 바다를 건너간 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견디고 다시 씨앗을 뿌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시간은 백 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1905년 봄.

옥례는 새벽부터 논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물여덟 살이었다. 남편 기석은 이미 앞서 논으로 나가 있었다.

봄 안개가 들판을 낮게 덮고 있었다.

옥례는 논둑에 멈춰 서서 흙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맨손으로 흙 한 줌을 집었다. 손가락 사이로 축축한 흙이 흘러내렸다.

농부에게 땅은 재산이기 전에 삶이었다. 아버지가 밟았고 할아버지가 밟았던 땅. 아이들이 태어나고 사람이 죽어 다시 돌아가던 땅이었다.

그때였다.

멀리 논둑 끝에서 낯선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옥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앞장선 남자의 옷차림이 마을 사람들과 달랐다. 그 뒤에는 통역을 맡은 듯한 조선인 한 사람이 따라오고 있었다.

옥례는 손에 묻은 흙을 털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날 옥례는 알지 못했다. 논둑을 걸어오던 저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이 들판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후손이 백 년도 더 지난 뒤, 녹슨 철제 상자 속에서 검게 변한 볍씨 한 알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을.

천년을 이어온 쌀의 이야기는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필자 최연호 | 전 KOTRA 수출전문위원 · 현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 역사소설 《천년의 미(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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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천년의 미(米)》 제2회

천 년 전의 배

― 서수 들판에 묻힌 백 년의 약속

이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서수의 옛사람들은 아마 물가의 창고부터 말했을 것이다.

고려 현종 9년, 서기로 1018년 가을이었다.

새벽안개가 들판을 덮어, 멀리서 보면 땅과 하늘을 가릴 수 없었다 한다. 수확을 끝낸 논에는 잘린 볏짚이 누워 있었고, 그 위로 하얀 물기가 내려앉았다.

그 안개 속을 사람들이 걸었다. 지게를 진 사람이 있었고, 소달구지를 끄는 사람이 있었고, 머리에 곡식 자루를 인 여자가 있었다. 가는 곳은 모두 한 곳, 강 가까이에 선 거대한 창고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진성창이라 불렀다.

그해 열두 살이던 연화가 아버지 무진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무진의 등에는 볏섬 하나가 얹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게가 끼익, 끼익 울었다. 연화는 한동안 그 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물었다.

“아부지.”

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부지.”

“왜.”

“힘들어요?”

“안 힘들다.”

연화가 볏섬을 올려다보았다.

“거짓말.”

무진이 피식 웃었다.

“니가 뭘 안다고.”

“힘드니까 땀나잖여.”

“사람은 걸으면 땀나는 겨.”

“나는 안 나는데.”

“너는 빈손이잖여.”

연화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빈손이었다. 잠시 후 무진이 말했다.

“그렇게 미안하면 좀 들어라.”

연화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요?”

“그려.”

“저걸?”

“응.”

연화는 볏섬과 아버지를 번갈아 보더니, 냉큼 앞서 걸었다.

“내가 생각해 봤는디, 아부지가 그냥 드는 게 낫겄어요.”

뒤에서 웃음이 터졌다. 끝순네였다. 남편을 일찍 잃고 어린아이 둘을 혼자 키우는 여자로, 몸집은 작았으나 목소리만큼은 마을 장정 셋을 합친 것보다 컸다고 전해진다.

“아이고메, 무진이 딸내미는 참말로 효녀도 효녀다!”

연화가 뒤돌아보았다.

“아주머니도 아무것도 안 들었잖여!”

끝순네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나?”

그러고는 머리 위의 광주리를 손으로 툭 쳤다.

“니 눈에는 이게 안 보이냐?”

“거기 뭐 들었는디요?”

“뭐가 들었든 니가 뭔 상관이여.”

연화가 가까이 다가가자 끝순네가 황급히 광주리를 뒤로 감췄다.

“보지 마!”

“뭔디 그래요?”

“엿이여.”

“엿?”

연화의 눈이 반짝였다. 끝순네가 혀를 찼다.

“괜히 말했네.”

연화가 곁에 딱 붙었다.

“하나만 줘요.”

“싫어.”

“하나만.”

“안 돼.”

“조그만 거.”

“귀찮게 허지 말고 가.”

연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아주머니 대신 광주리 들어줄게요.”

“니가?”

끝순네가 연화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까 볏섬은 못 든다며?”

“볏섬은 무겁잖여.”

“그럼 내 광주리는 가볍고?”

“엿은 가볍잖여.”

끝순네가 어이없다는 듯 무진을 바라보았다.

“무진아.”

“왜.”

“저 입은 누구 닮았냐?”

무진이 대답했다.

“지 에미.”

뒤에서 연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무진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사람들이 웃었다.

새벽안개 속으로 웃음이 퍼졌다.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올해 농사가 풍년이었어도 겨울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배고픈 중에도 웃었다. 웃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옛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진성창에 이르자 연화는 입을 벌렸다.

“와.”

창고가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채가 강을 따라 늘어서 있었고, 사람과 소와 수레가 뒤엉켰으며, 곡식 자루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관리들이 소리를 질렀다.

“줄을 맞추시오!”

“고을을 밝히시오!”

“다음!”

연화는 아버지 옷자락을 잡았다.

“아부지.”

“왜.”

“저게 다 쌀이에요?”

“그런갑다.”

“누가 다 지었어요?”

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가 다시 물었다.

“아부지.”

“왜.”

“누가 다 지었냐고.”

무진은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굽은 허리, 갈라진 손, 해에 그을린 얼굴들이 거기 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지었제.”

마침내 무진의 차례가 왔다. 볏섬을 내려놓자 관리 하나가 곡식을 살폈고, 젊은 서리가 장부를 펼쳤다.

“어느 고을인가?”

“임피입니다.”

“어느 마을?”

무진이 대답했다. 붓이 서걱서걱 움직였다.

“다음.”

끝이었다.

무진은 빈 지게를 들었다. 그러나 연화는 움직이지 않고 장부를 쓰던 서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서리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느냐?”

연화가 물었다.

“우리 아부지 이름은 안 물어봐요?”

주변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무진이 황급히 딸의 팔을 잡았다.

“가자.”

연화가 버텼다.

“근디 왜 이름은 안 물어보는디요?”

서리가 웃었다.

“이름이 왜 필요하냐?”

“아부지가 키운 쌀이잖여.”

사람 몇이 웃었다. 하지만 서리는 웃지 않았다. 연화가 다시 물었다.

“쌀이 누구 건지는 적으면서, 키운 사람이 누군지는 왜 안 적어요?”

무진이 딸의 팔을 끌었다.

“고만 혀.”

연화가 자꾸 뒤를 돌아보는 동안, 서리는 한동안 그 아이를 바라보다가 장부로 눈을 돌렸다. 다음 곡식이 들어오고, 다음 사람이 오고, 또 다른 마을 이름이 적혔다.

그러나 사람의 이름은 적히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 연화가 물었다.

“아부지.”

“왜.”

“쌀은 누가 키웠는지 말 못 해요?”

무진이 딸을 바라보았다.

“쌀이 말을 어찌 허냐.”

“입이 없어서?”

“그려.”

“그럼 누가 말해야 혀?”

무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끝순네가 옆에서 말했다.

“니가 혀.”

연화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그래. 니가 말이 제일 많잖여.”

사람들이 다시 웃었다. 연화만 웃지 않았다. 그 아이는 진지했다.

“그럼 내가 기억할게요.”

무진이 물었다.

“뭘?”

연화는 말했다.

“저 쌀을 아부지가 키웠다는 거.”

무진의 걸음이 멈췄다. 가을바람이 지나가고, 수확이 끝난 논 위로 마른 볏짚이 흔들렸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한다.

열두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천 년을 건너갈 이야기의 첫 문장이 될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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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천년의 미(米)》 제3회

바다로 가는 쌀

― 서수 들판에 묻힌 백 년의 약속

진성창에 볏섬을 내고 며칠이 지난 뒤, 임피 장터에 소문 하나가 굴러들어왔다.

“들었는가?”

“뭘?”

“새 현령이 온다잖여.”

“현령?”

“그래.”

끝순네는 새 현령보다 생선값이 더 급했다. 좌판에 놓인 생선 두 마리를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말했다.

“현령이 오든 현령 할아비가 오든 생선값이나 좀 싸졌으면 좋겄구먼.”

생선 장수가 버럭 소리쳤다.

“내가 현령이오? 나한테 왜 그려!”

“그려도 비싸잖여.”

“싫으면 사지 마!”

끝순네는 생선을 내려놓았다.

“안 사.”

장수가 당황했다.

“진짜 안 사?”

“안 산다니께.”

“그럼 한 푼 깎아줄 테니 가져가.”

끝순네가 씨익 웃었다.

“두 푼.”

“한 푼.”

“두 푼.”

“도둑년이 따로 없네.”

“그럼 안 사.”

“알았어! 두 푼!”

끝순네가 생선을 집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연화가 감탄했다.

“아주머니.”

“왜.”

“대단혀요.”

끝순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세상 사는 데는 주먹보다 배짱이여.”

옆에 있던 물쇠 영감이 혀를 찼다.

“그 배짱 때문에 니가 시집을 또 못 가는 겨.”

끝순네가 생선을 번쩍 들었다.

“이걸로 한 대 맞아볼텨?”

물쇠 영감이 얼른 뒤로 물러났다.

“농담도 못 허겄네.”

사람들이 웃었다.

그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떠들썩하던 장터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좌판과 길 가장자리로 물러섰다. 말을 탄 관리들이 나타났다.

연화가 까치발을 들었다.

“아부지.”

“조용히 혀.”

“어느 사람이 현령이에요?”

“저기 가운데.”

연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현령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안 무섭게 생겼는디.”

무진이 황급히 딸의 입을 막았다.

“입 다물어.”

연화는 아버지의 손을 밀어냈다. 물쇠 영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령 앞에서 그런 말 허다가 잡혀간다.”

“왜 잡혀가요?”

“높은 양반이니께.”

“얼마나 높은디요?”

물쇠 영감이 수염을 만졌다.

“그건 나도 모르제.”

“모르면서 왜 아는 척혀요?”

사람들이 웃었다. 물쇠 영감의 얼굴이 붉어졌다.

“요놈의 계집애가!”

연화는 얼른 무진의 뒤로 숨었다.

“근디 우리 임피는 왜 현령이 와요?”

물쇠 영감이 이번에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큰 고을이니께 그러겄지.”

“뭐가 큰디요?”

“땅이 넓잖여.”

“또요?”

“곡식도 많이 나고.”

“또요?”

“사람도 많고.”

“또?”

“아이고메!”

물쇠 영감이 소리쳤다.

“니가 현령보다 더 무섭다!”

사람들이 다시 웃었다.

당시 현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벼슬의 수령이 부임한 것은 아니었다. 보통 크고 작은 고을에는 현감이 파견되었지만, 임피에는 그보다 격이 높은 현령이 부임했다. 《고려사》에는 전주목이 관할하던 고을 가운데 현령관이 네 곳이었다고 전한다. 임피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임피의 들에서는 많은 곡식이 났고, 그 곡식은 진성창에 모였다. 창고를 채운 세곡은 배에 실려 강과 바다를 지나 나라의 수도 개경으로 올라갔다. 개경의 관청과 군대, 왕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먹을 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임피에 현령이 오는 까닭을 넓은 들과 쌀에서 찾았다. 나라가 이 고을의 땅과 물길, 그리고 진성창에 쌓이는 곡식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연화는 멀리 들판을 바라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들이었다. 강이 있었고, 창고가 있었으며, 그 창고로 수많은 쌀이 들어갔다.

“그럼 우리 임피가 중요한 고을이에요?”

무진이 말했다.

“그런갑다.”

“근디요.”

무진의 얼굴이 굳었다. 딸이 ‘근디요’라고 말하면 반드시 골치 아픈 질문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뭐냐.”

“땅이 중요하고 쌀이 중요해서 높은 현령까지 보내는 거라면요.”

연화가 잠시 말을 멈추고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 쌀 키우는 사람도 중요한 사람 아닌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물쇠 영감도, 끝순네도, 무진도 입을 열지 못했다.

현령의 행렬이 장터를 지나갔다. 사람들은 허리를 숙였고, 연화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아이의 눈만은 들판을 향해 있었다.

나라가 중요하게 여기는 땅. 나라가 필요로 하는 쌀. 그 쌀을 실어 나르는 창고와 배.

그렇다면 왜 그것을 만드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가.

열두 살 연화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도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훗날 서수 사람들은 그 차이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이는 모르면 물었고, 어른은 알아도 침묵했다고.

겨울이 지나고 바람에서 얼음 냄새가 사라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진성창 가까운 강가에 사람들이 모였다. 지난가을부터 창고에 보관돼 있던 곡식을 배에 싣는 날이었다. 짐꾼들은 볏섬을 어깨에 메고 널빤지 위를 쉴 새 없이 오갔다. 볏섬이 배 안에 차곡차곡 쌓였고, 뱃사람들은 돛과 밧줄을 살폈다.

연화는 강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배를 올려다보았다.

“저게 다 떠요?”

“안 뜨면 배겠냐.”

말한 사람은 억쇠였다. 진성창과 물길을 오가는 뱃사람으로,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렸고 목소리는 천둥 같았다.

“아저씨는 배 타요?”

“그려.”

“무서워요?”

“하나도 안 무섭다.”

옆에 있던 뱃사람이 웃었다.

“거짓말 마라. 저번 풍랑 때 울었잖여.”

억쇠가 버럭 소리쳤다.

“바닷물이 눈에 들어간 겨!”

“바닷물이 눈에서 나오든디?”

“시끄러!”

연화가 웃었다.

“울었구먼.”

“안 울었어!”

억쇠가 밧줄을 세게 잡아당겼다.

“애들은 저리 가!”

그러나 연화는 움직이지 않았다.

“개경까지 가요?”

“그려.”

“얼마나 걸려요?”

“바람이 알아서 헌다.”

“바람이 안 불면?”

“기다리고.”

“너무 세게 불면?”

억쇠의 손이 잠시 멈췄다.

“살아남아야제.”

연화는 웃음을 거뒀다.

“죽을 수도 있어요?”

억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밧줄을 단단히 묶었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사람은 밭에서도 죽고, 집에서도 죽고, 배에서도 죽는다.”

“근디 왜 배를 타요?”

억쇠가 연화를 바라보았다.

“먹고살라고.”

그러고는 되물었다.

“농부도 농사짓다가 죽을 수 있는디 왜 농사짓는 줄 알어?”

“먹고살라고.”

억쇠가 웃었다.

“그려.”

연화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근디 우리가 키운 쌀은 왜 먹고살라고 떠나는 거예요?”

억쇠의 웃음이 멈췄다.

“그건 니 아부지한테 물어라.”

멀찍이 서 있던 무진이 소리쳤다.

“왜 나한테 넘겨!”

사람들이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연화는 강 쪽으로 길게 열린 물길을 바라보았다.

“이 강에는 옛날부터 배가 다녔어요?”

억쇠가 밧줄을 잡은 채 대답했다.

“물이 생긴 날부터 다녔겄지.”

“또 모르는 말로 넘긴다.”

연화가 입을 삐죽이자 물쇠 영감이 끼어들었다.

“아주 먼 옛날에는 저 물길로 당나라 군선이 올라갔다고 혀.”

“당나라가 여기에도 왔어요?”

“그건 누가 알겄냐. 백제 부여를 치러 금강으로 들어왔다는 말이 내려오는 겨.”

“그럼 포구의 쌀도 빼앗았대요?”

영감은 헛기침을 했다.

“큰 군대가 지나가면 물하고 곡식부터 찾는 법이제.”

“누가 봤대요?”

이번에는 억쇠가 웃었다.

“저 영감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 일을 다 본 것처럼 말혀.”

사람들이 다시 웃었다. 무진만 강물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그 옛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제. 근디 군대가 지나가면 백성이 먼저 쌀을 잃는다는 건 틀리지 않을 겨.”

연화는 더 묻지 않았다.

강은 곡식을 실어 나르는 길이었고, 때로는 군대가 들어오는 길이기도 했다. 물은 어느 편도 아니었지만, 물가에 사는 사람들은 늘 먼저 흔들렸다.

마침내 출항이 시작됐다. 밧줄이 풀리고 돛이 올라갔다. 배가 천천히 움직이자 검은 뱃머리가 잔잔하던 강물을 양쪽으로 갈랐다.

연화가 소리쳤다.

“억쇠 아저씨!”

배 위에 선 억쇠가 돌아보았다.

“왜!”

“안 죽고 와요!”

사람들이 웃었다. 억쇠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니가 시끄러워서라도 돌아온다!”

배가 멀어졌다. 한 척, 두 척. 곡식을 실은 배들이 물길을 따라 움직였다. 연화는 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진이 물었다.

“뭘 그리 보냐?”

“쌀이 어디까지 가나 보려고.”

“안 보일 때까지 가겄지.”

“아부지.”

“왜.”

“저 쌀은 우리를 기억할까요?”

무진이 딸을 바라보았다.

“쌀이 어찌 기억을 허냐.”

“그럼 강물은?”

“강물도 모르겄다.”

“배는?”

무진은 한숨을 쉬었다.

“왜 세상 모든 것이 너를 기억해야 허냐?”

연화가 말했다.

“우리는 저 쌀을 기억하잖여.”

무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배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쌀은 강을 따라갔고, 강은 바다를 향했다. 사람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연화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한다.

자신들이 키운 쌀은 사람보다 먼저 먼 세상으로 가고 있었다.

그 쌀이 어디에 닿을지, 누구의 밥이 될지,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강물만이 알고 있는 듯했다.

쌀이 떠나온 들판과 그 쌀을 키운 사람들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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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천년의 미(米)》 제4회

"쌀은 떠나도 볍씨는 남겨야 혀"

― 서수 들판에 묻힌 백 년의 약속

곡식을 실은 배가 안개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연화는 한동안 강가에 서 있었다. 쌀은 강을 따라 바다로 갔고, 사람들은 다시 들판으로 돌아왔다.

세월은 물처럼 흘렀다.

무진이 죽은 것은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겨울이었다. 거창한 병은 아니었다. 기침을 오래 했을 뿐이었다. 농부에게 아프다는 말은 늘 뒤로 밀리는 법이었다. 논부터 봐야 했고, 둑부터 고쳐야 했고, 소에게 여물을 줘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무진은 일어나지 못했다. 연화가 아버지 곁에 앉았다.

“볍씨는?”

“있어요.”

“보여줘.”

연화가 작은 항아리를 가져왔다. 지난해 골라둔 씨앗이 들어 있었다. 무진이 웃었다.

“잘 골랐네.”

“아부지가 가르쳐줬잖여.”

“내가?”

“벌써 잊었어요?”

무진의 웃음이 기침으로 바뀌었다. 연화는 아버지의 등을 두드렸다.

“아부지, 안 죽을 거지?”

무진은 한참 말이 없었다.

“사람은 다 죽어.”

“그런 말 하지 마.”

“안 한다고 안 죽냐.”

연화가 울자 무진이 말했다.

“울지 마. 니가 울면 시끄러워.”

연화는 울면서도 웃었다.

“누구 딸인데.”

무진도 희미하게 웃었다. 잠시 뒤 그가 물었다.

“내 이름 기억허냐?”

“아부지 이름을 왜 몰라!”

“말해봐.”

“무진. 농부 무진. 그리고 내 아부지.”

무진이 눈을 감았다.

“그거면 됐다.”

장례가 끝난 뒤 연화는 관아로 갔다. 오래전 진성창에서 농부의 이름은 묻지 않고 고을과 곡식만 적었던 서리를 찾아간 것이다. 젊었던 서리 만복은 어느새 중년이 되어 있었다.

“절 기억혀요?”

만복이 연화를 한참 바라봤다.

“누구더라.”

“연화.”

만복의 눈이 커졌다.

“쌀자루는 적으면서 왜 농부 이름은 안 적느냐고 따졌던 아이.”

“기억하네.”

“그때 네 말 때문에 밤새 생각했다.”

“답은 찾았어요?”

만복은 고개를 저었다.

“못 찾았다.”

연화가 말했다.

“우리 아부지가 죽었어요. 이름은 무진이에요.”

만복은 붓을 들어 종이에 썼다.

무진.

연화는 그 글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이제 안 없어져요?”

“종이가 남아 있는 동안은.”

“종이가 없어지면?”

만복이 대답하지 못하자 연화가 말했다.

“내가 기억할게.”

“그럼 된다.”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에게 말해.”

“그 사람도 죽으면?”

“또 다른 사람에게.”

연화가 물었다.

“그럼 천 년 갈 수 있어요?”

만복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한테 천 년은 길지. 하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넘기면 생각보다 짧을 수도 있다.”

그날 만복은 종이에 세 가지를 남겼다. 무진, 연화, 그리고 빈칸 하나였다.

“저건 뭐여?”

“다음 사람 자리.”

“누군데?”

“아직 모르지.”

그날 밤 연화는 볍씨를 손에 올렸다. 한 알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씨앗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사람도, 이름도, 기억도 그랬다. 그 무렵부터 사람들 사이에 한마디가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쌀은 떠나도 볍씨는 남겨야 혀.”

사람들은 그것을 농사 이야기로 들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다.

연화가 죽고 만복도 죽었다. 억쇠는 어느 날 배를 타고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끝순네가 여든을 넘겼는지, 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물쇠 영감의 진짜 이름은 끝내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러나 들판은 남았다. 봄이면 모를 심었고, 여름이면 물을 보았고, 가을이면 벼를 베었다.

그사이 왕이 바뀌고 전쟁이 일어났다. 1358년 왜구가 금강 하구의 진성창을 덮쳤다는 소식이 임피의 마을들을 흔들었다. 창고의 곡식이 불타고 빼앗겼다는 말이 돌았고, 바다 가까운 창고를 안쪽으로 옮기라는 명령도 내려왔다. 누구는 나라의 곡식을 지켜야 한다고 했고, 누구는 먼저 가족을 피신시켜야 한다고 했다. 창고가 털리면 백성이 다시 곡식을 채워야 한다는 것을 농부들은 알고 있었다.

“나라 창고부터 지켜야 혀!”

사람들은 밤새 볏섬을 옮겼다. 그런데 한 농부는 자기 집으로 달려가 종자로 쓸 볍씨 항아리를 마루 밑에 묻었다.

“관아 쌀은 안 옮겨?”

아들이 묻자 농부가 대답했다.

“나라 쌀은 올해를 먹이지만, 볍씨는 내년을 먹이는 겨.”

1380년 8월에는 진포에 왜선 수백 척이 들이닥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고려 수군이 새로 만든 화포로 왜선을 불태웠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장터에서는 술 한 사발을 돌렸고, 아이들은 불붙은 배가 바다를 가득 메웠다며 보지도 못한 광경을 떠들었다. 그러나 늙은 뱃사람 하나는 웃지 않았다.

“배를 잃은 놈들이 어디로 가겄냐.”

그 말대로 퇴로를 잃은 왜구는 옥주와 영동, 선산과 상주를 지나며 내륙을 약탈했다. 진성창의 남은 곡식을 다시 뒤졌다는 소문도 돌았다. 누구도 그것을 직접 보았다고 나서지는 못했지만, 빈 창고와 불탄 집을 본 사람은 있었다. 왜구는 마침내 남원 운봉 쪽으로 몰렸고, 그해 9월 황산에서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크게 패했다.

“이성계가 누구여?”

“북쪽에서 온 장수라더라.”

“왜구만 다시 안 오면 누구든 상관없어.”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 장수가 열두 해 뒤 새 왕조를 세우리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전쟁이 지나갈 때마다 창고는 비었고 사람은 사라졌다. 그러나 봄이 오면 살아남은 이들이 다시 논으로 들어갔다. 무너진 둑을 쌓고, 불탄 집터에서 농기구를 찾아내고, 겨우 지켜낸 볍씨를 물에 담갔다. 나라는 백성에게 창고를 먼저 지키라 했지만 농부들은 볍씨를 지켜야 창고도 다시 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390년에는 금강을 더 거슬러 올라간 용안에 득성창이 세워졌다. 진성창으로 모이던 세곡의 길이 달라지면서 오래도록 북적이던 강가도 차츰 조용해졌다. 큰 창고의 역할은 줄었지만, 물길과 들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1392년 고려가 끝나고 조선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들판의 농부에게 나라가 바뀌었다는 소식은 늦게 왔다. 다복이 논에서 김을 매고 있을 때 장돌뱅이 하나가 소리쳤다.

“왕이 바뀌었대!”

다복이 허리를 폈다.

“새 왕 이름이 뭔디?”

장돌뱅이가 입을 다물자 옆의 농부가 웃었다.

“왕 이름도 모르면서 뭘 알려준다고 소리여.”

“중요한 건 나라가 바뀌었다는 거여!”

다복이 물었다.

“그럼 세금 안 내?”

“그건 내겄지.”

“군역은?”

“그것도 허겄지.”

“그럼 뭐가 달라졌어?”

장돌뱅이가 생각하다 말했다.

“왕이 달라졌잖여.”

다복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왕은 서울에 있고 나는 논에 있는디.”

사람들이 웃었다. 장돌뱅이가 소리쳤다.

“무식한 놈들!”

다복이 대꾸했다.

“배고픈 무식쟁이한테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욕혀!”

그렇게 새 나라가 세워지고 법과 관리가 바뀌었다. 하지만 봄은 그대로 왔다. 어느 날 다복의 어머니가 마루에서 좋은 볍씨를 따로 고르고 있었다.

“먹으면 되잖여.”

“씨앗까지 먹으면 내년에 뭘 심을래?”

어머니는 볍씨를 항아리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어른들이 그랬어. 쌀은 떠나도 볍씨는 남겨야 헌다고.”

“누가 그랬는디?”

어머니는 한참 생각했다.

“몰라.”

“엄니가 지어낸 거 아녀?”

빗자루가 날아왔고 다복은 논둑까지 도망쳤다.

그 말은 이미 주인을 잃었지만 살아 있었다. 고려가 끝나고 왕이 바뀌었어도 말은 사람의 입에서 다음 사람의 귀로 건너갔다. 볍씨처럼.

강물은 수많은 배와 전쟁을 흘려보냈다. 사람의 이름은 사라져도 물은 그들이 지킨 들판을 지나갔다. 시대는 바뀌어도 논은 남았다.

필자 최연호 | 전 KOTRA 수출전문위원 · 현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 역사소설 《천년의 미(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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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천년의 미(米)》 제5회

농부의 이름

― 서수 들판에 묻힌 백 년의 약속

고려가 끝나고 조선이 시작되었다. 왕이 바뀌고 법과 관리가 달라졌지만 들판에는 다시 봄이 왔다. 농부들은 지난해 남겨둔 볍씨를 꺼내 물에 담갔다.

세월이 더 흘러도 임피는 여전히 현이었다. 현령이 부임하고, 한 사람이 떠나면 또 다른 현령이 왔다. 그해 봄에도 새 현령이 온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길가로 모였다. 옥분이 아들 석구의 머리를 눌렀다.

“숙여.”

“왜?”

“사또 나리 오시잖여.”

“내가 뭘 잘못했는디?”

“잘못해서 숙이는 거 아녀.”

“그럼?”

옥분이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박 서방이 말했다.

“높은 분이니께 숙이는 겨.”

석구가 물었다.

“얼마나 높은디?”

“종오품이래.”

“종오품이 뭔디?”

박 서방이 입을 다물었다.

“모르잖여.”

“알 필요 없어!”

사람들이 웃었다. 옥분은 아들의 뒤통수를 가볍게 쳤다.

“입 다물어.”

석구는 투덜거렸다.

“물어볼 수도 있지.”

사또의 행렬이 지나갔다. 사람들은 허리를 숙였고, 말발굽이 흙길을 두드렸다. 행렬이 사라진 뒤에도 석구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엄니.”

“왜.”

“저 양반도 농사져?”

“안 짓겄지.”

“그럼 쌀은 누가 줘?”

옥분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우리가.”

“왜?”

“아이고, 좀 조용히 혀!”

석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옥분은 아들의 귀를 잡아당겼고 사람들이 다시 웃었다.

그 시절 관아에는 최치복이라는 아전이 있었다. 글씨를 잘 썼고 셈도 빨랐다. 농민들은 그를 싫어하면서도 필요로 했다. 글을 읽거나 관아의 문서를 알아볼 일이 생기면 결국 그를 찾아갔다.

“치복이 형님, 이것 좀 읽어줘.”

“돈은?”

“무슨 돈?”

“공짜로 해달라고?”

“이웃끼리 돈을 왜 받아.”

치복이 혀를 찼다.

“그러니까 네가 평생 가난한 겨.”

그러면서도 그는 문서를 받아 끝까지 읽어주었다.

어느 날 석구가 관아에 왔다. 방 안에는 장부가 높이 쌓여 있었다.

“저게 다 뭐여?”

치복이 대답했다.

“사람과 땅과 곡식.”

“사람도 적어?”

“적지.”

“그럼 우리 엄니도?”

“호적에는 있겄지.”

“우리 논도?”

“있고.”

석구는 장부를 한참 바라보았다.

“사람하고 땅하고 쌀이 다 적혀 있네.”

“그려.”

“그럼 누가 제일 중요혀?”

치복이 웃었다.

“갑자기 뭔 소리냐?”

“셋 중에서.”

치복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나라에서는 셋 다 중요하지.”

석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디 사람은 죽고, 땅은 뺏기고, 쌀은 가져가잖여.”

치복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누가 그런 말을 했냐?”

“아무도.”

“근디?”

“보면 알잖여.”

치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그는 등잔불 아래서 장부를 넘겼다. 수많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름이 장부에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존중받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역사는 기록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누구의 눈으로 기록했는지가 더 중요할 때도 있었다.

또 세월이 흘렀다. 비가 사흘째 내리자 가뭄 끝의 단비라며 사람들이 웃었다. 아이들은 처마 밑에서 손을 내밀었고, 여자들은 물동이를 채웠으며, 농부들은 논에 차오르는 물을 반겼다.

닷새째가 되자 웃는 사람이 줄었다. 물이 둑 가까이 올랐다. 일곱째 날 밤, 마을 사람들이 ‘물돌이’라 부르던 늙은 농부가 빗속에서 소리쳤다.

“나와! 둑이 넘어간다!”

남자들이 삽을 들고 뛰어나왔다. 여자들은 흙을 담았고 아이들도 돌을 날랐다. 그 위로 비가 쉬지 않고 쏟아졌다.

“윗둑을 터야 혀!”

“미쳤어? 그러면 우리 논 다 죽어!”

“안 터면 마을이 잠겨!”

“니 논 아니라고 막말허냐!”

삿대질이 몸싸움으로 번지려는 순간, 갓난아이를 등에 업은 월선이 빗속으로 나섰다.

“논이 사람보다 중요혀?”

사람들이 멈췄다.

“벼는 내년에 또 심어! 사람 죽으면 다시 심을 수 있어?”

한 사내가 젖은 얼굴을 훔치며 말했다.

“근디 저 논이 우리 전부여.”

월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알어. 그래도 살아야 내년에 다시 농사짓제.”

사람들은 결국 윗둑 일부를 터뜨렸다. 물이 굉음을 내며 들판으로 쏟아졌고, 횃불 아래에서 벼가 잠겼다. 한 해 농사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어떤 사람은 울었고, 어떤 사람은 욕했으며, 어떤 사람은 진흙 위에 주저앉았다.

비가 그친 뒤 월선의 남편 길복은 잠긴 논을 바라보았다.

“다 끝났네.”

“안 끝났어.”

“뭐가 남았는디?”

월선은 등에 업힌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길복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월선이 물었다.

“씨앗은?”

“조금 있어.”

“그럼 안 끝났어.”

“겨울을 어찌 버텨.”

“버텨야제.”

“말은 쉽지.”

월선이 남편을 노려봤다.

“그럼 죽을래?”

“누가 죽는대!”

“살 거면 그런 얼굴 하지 마.”

길복이 피식 웃었다.

“당신은 무서운 게 없어?”

“많지.”

“근디?”

“무서워도 살아야지.”

그해 겨울 사람들은 굶었다. 서로 곡식을 빌렸고 산에서 뿌리를 캤으며, 먹을 것이 생기면 아이들에게 먼저 주었다. 그래도 종자로 쓸 볍씨만큼은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다.

한 집에서 볍씨를 먹었다는 소문이 나면 이웃들이 조금씩 씨앗을 나눠주었다.

“우리도 먹을 게 없는디 왜 줘?”

월선이 대답했다.

“저 집이 내년에 농사 못 지으면 우리도 굶어.”

봄이 오자 관아에서는 큰물의 피해를 조사하러 아전을 보냈다. 장부에는 물에 잠긴 논이 몇 결인지, 무너진 집이 몇 채인지, 죽은 소가 몇 마리인지가 적혔다. 아전은 먹을 것이 떨어진 집의 수와 빌려준 곡식의 양도 물었다.

그러나 누가 먼저 빗속으로 뛰어들었는지, 누가 자기 논을 버리고 윗둑을 텄는지, 누가 마지막 볍씨를 이웃에게 나눠주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길복이 장부를 들여다보다 말했다.

“여기에는 당신 이름이 없네.”

월선이 젖은 볍씨를 널며 대답했다.

“내 이름이 벼를 키워?”

“그래도 당신이 마을을 살렸잖여.”

“나 혼자 살렸간디? 다 같이 삽 들고 흙 날랐제.”

길복은 더 말하지 못했다. 장부에는 이름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큰물이 났던 밤 월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느 집이 씨앗을 나누었는지, 누가 끝까지 둑 위에 남았는지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농부의 이름은 종이보다 사람의 입에서 더 오래 살아남기도 했다.

윗논이 물을 다 가지면 아랫논이 죽고, 한 집이 볍씨를 독차지하면 마을이 죽는다. 사람들은 싸우고 욕하고 서로 미워하면서도, 끝내 씨앗을 나누며 같이 살아남았다.

현령은 떠나면 다른 현령이 왔다. 장부는 낡으면 새 장부로 바뀌었다. 농부의 이름은 기록에서 지워지기도 했지만 그들이 지킨 논과 볍씨는 자식에게, 다시 그 자식에게로 넘어갔다.

그 이름 없는 계보의 끝에서 훗날 귀덕이라는 여인이 손녀 옥례에게 볍씨를 고르는 법을 가르치게 된다.

시대마다 농부의 이름은 달랐지만, 그들의 손에 남은 흙은 같은 들판의 흙이었다.

필자 최연호 | 전 KOTRA 수출전문위원 · 현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 역사소설 《천년의 미(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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