瑞穂新聞 서수신문
기사 공유
기획특집 · 일본 농촌에서 배운다

교황이 먹은 쌀, 한계마을을 살리다

이시카와현 하쿠이시 미코하라(神子原) 마을 — 쌀값을 세 배로 올리고 젊은 가족을 불러들인 60만 엔짜리 기적

일본 산촌의 계단논과 브랜드 쌀을 표현한 자료 이미지
미코하라의 계단논과 쌀 브랜드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자료 이미지. 이미지 제작: 서수신문 편집국·AI 생성 이미지 ※ 실제 미코하라 현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인구 500명, 고령화율 57%. 2005년 일본 이시카와현 하쿠이시(羽咋市) 산골의 계단논 마을 미코하라는 지도에서 사라질 날을 기다리는 ‘한계집락(限界集落)’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이 마을 쌀은 로마 교황의 식탁에 올랐고 한 가마 값은 세 배로 뛰었다. 빈집에는 도시의 젊은 가족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쌀 한 톨에 이야기를 입혀 마을을 되살린 미코하라의 길을 따라가며, 같은 쌀의 고장 서수면이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묻는다.

사라져 가던 산골 계단논 마을

미코하라는 노토반도 입구의 산자락에 계단논이 펼쳐진 마을이다. 경지 면적은 110ha였지만 그중 46ha가 놀리는 땅이 됐다. 인구는 20년 사이 절반으로 줄어 500명 안팎이 남았고, 2005년 고령화율은 57%에 이르렀다.

농가들은 쌀을 농협에 넘겨 한 가마(60kg)에 1만3천~1만4천 엔을 받았다. 농가 평균 농업소득은 연 87만 엔 수준이었다. 자식들은 도시로 떠났고, 마을에는 “우리 대에서 끝난다”는 체념이 퍼져 있었다. 이는 지금 한국 농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60만 엔으로 시작한 한 공무원의 도전

변화는 한 사람의 시청 공무원에게서 시작됐다. 다카노 조센(高野誠鮮)은 2005년 4월 신설된 ‘1.5차 산업진흥실’을 맡아 미코하라 살리기에 나섰다. 그가 받은 예산은 60만 엔이었다.

여기에는 그의 계산이 있었다. 600만 엔을 요구했다가 실패하면 “예산이 모자라서”라는 변명이 남는다. 그는 일부러 적은 예산을 택하고 광고비 대신 언론의 관심을 끌어내는 방식을 썼다. “성공할 때까지 실패를 계속했을 뿐”이라는 그의 말은 이 태도를 보여 준다.

처음부터 마을이 호응한 것은 아니었다. 설명회에서 함께하겠다고 나선 집은 169가구 가운데 세 집뿐이었다. 그는 반대하는 주민을 설득하는 대신 작은 성과를 먼저 보여 주는 길을 택했다.

이름에서 찾은 이야기, 교황의 식탁으로

다카노가 주목한 것은 마을 이름이었다. 神子原를 풀어 쓰면 ‘신의 아들이 사는 들판’, 영어로는 “The highlands where the son of God dwells”가 된다. 그는 이 이름이면 그리스도교 세계의 상징인 로마 교황에게 쌀을 올릴 명분이 있다고 보았다.

처음에는 일본 천황과 미국 대통령도 두드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가 끝까지 두드린 곳이 교황청 대사관이었다. 2005년 10월 시장이 도쿄 대사관을 찾아 미코하라 쌀 35kg을 전했고, 그해 12월 교황 헌상이 결정됐다. 대사는 “작은 마을과 우리나라의 다리가 되자”고 말했다. 교황청 헌상 기록에는 일본에서 쌀이 올라온 전례가 없었다고 한다.

‘로마 교황이 드신 쌀’이라는 이야기는 언론을 타고 순식간에 퍼졌다. 광고비는 한 푼도 들지 않았다. 한 달 만에 700~800가마가 전화 주문으로 팔렸다. 같은 쌀, 같은 논이었지만 이야기가 붙자 값이 달라졌다.

값은 농민이 정한다

두 번째 핵심은 판매 구조였다. 미코하라는 쌀을 농협에 넘기는 대신 직접 팔고, 값도 스스로 정했다. 농협 출하 때 한 가마에 1만3천~1만4천 엔이던 쌀이 약 4만2천 엔에 팔렸다. 소매가로는 1kg에 700엔이었다.

직판의 그릇은 농민이 주인인 법인이었다. 2007년 3월 농가들이 출자한 농업법인 「주식회사 미코노사토(神子の里)」가 문을 열었다. 처음 세 집뿐이던 참여는 169가구 중 131가구의 출자로 늘었다. 같은 해 7월 문을 연 농산물 직매장 ‘미코노사토’는 첫해 6,800만 엔의 매출을 올렸다.

직매장 건립비 1억1,400만 엔은 국비 50%, 현비 10%, 지방채 40%로 마련했다. 이후 출자 가구는 147가구, 자본금은 700만 엔으로 늘었다. 출하 농가는 200명을 넘어섰고 취급 상품은 약 1,000종, 연 매출은 1억 엔을 넘었다. 쌀만 파는 것이 아니라 채소와 가공품까지 마을의 모든 생산물이 한 창구로 모였다.

사람이 돌아오는 마을

미코하라는 쌀값만으로는 마을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을 부르는 장치를 함께 만들었다.

  • 빈 농가·농지 정보은행: 빈집과 놀리는 논을 모아 귀농 희망자에게 연결했다. 마을이 면접을 통해 함께 살 사람을 골랐다.
  • 에보시오야(烏帽子親) 제도: 옛 성인식의 ‘대부모’ 풍습을 빌려, 도시 대학생이 농가의 양자처럼 머물며 농사를 거들었다. 2005년 시작했고 1박2일 체험비는 성인 5,000엔, 대학생 2,500엔이었다.
  • 교류 행사: 2006년부터 도쿄 대학생 30여 명이 농사 합숙을 왔고, 계단논 히나 인형 축제를 해마다 열었다.

결과는 숫자로 나타났다. 2005년 57%이던 고령화율은 2008년 51.5%로 낮아졌다. 가장 심각했던 스가이케(菅池) 마을은 2010년 고령화율 47.5%로 한계집락을 벗어났다. 이주민은 2009년 11가족 32명에서 2015년 13가족 39명으로 늘었고, 대부분 30대 젊은 세대였다.

이후 하쿠이시는 기무라 아키노리(木村秋則)의 무농약·무비료 ‘자연재배’를 배우는 농사학교를 열었다. 더 안전한 쌀로 브랜드의 신뢰를 한 단계 더 높이려는 것이었다. 자연재배 채소는 지역 학교 급식에도 쓰이고 있다.

서수 쌀에 묻는다

미코하라의 성공은 큰 예산이나 특별한 품종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미 가진 것에서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 값을 농민이 가져가는 구조를 만든 데서 나왔다. 서수면이 배울 점은 네 가지로 정리된다.

  1. 쌀에 이야기를 입혀야 한다. 미코하라가 마을 이름 하나에서 이야기를 찾았다면, 서수면에는 이미 더 깊은 이야기가 있다. 일제강점기 서수 쌀은 도쿄와 오사카의 쌀 박람회에서 잇달아 금상을 받았다. 서수에서 거둔 쌀이 일본 천황의 제사에 쓰이는 제사미(祭祀米)로 헌곡(獻穀)됐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미코하라 쌀이 2005년 교황의 식탁에 오르며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서수 쌀은 그보다 훨씬 앞서 일본 최고의 자리에서 품질을 인정받았다. 여기에 그 쌀을 지키려 일어선 1927년 옥구농민항쟁이 더해진다. 제국이 인정한 쌀과, 그 쌀을 빼앗긴 농민의 저항이 한 들판에 함께 있다. 이것은 다른 어느 지역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산이다.
  2. 값은 농민이 정해야 한다. 브랜드가 생겨도 유통을 남에게 맡기면 늘어난 값은 농가에 돌아오지 않는다. 미코하라처럼 주민이 출자하는 법인과 직판 창구가 필요하다.
  3. 작게 시작해 성과로 설득해야 한다. 미코하라도 세 집에서 시작했다. 마을 전체의 합의를 기다리기보다 보여 줄 수 있는 첫 성과가 먼저다.
  4. 쌀과 사람을 함께 불러야 한다. 쌀이 팔려도 사람이 없으면 마을은 이어지지 않는다. 빈집 연결, 도시 청년과의 농사 교류, 한·일 농촌 교류를 쌀 브랜드와 하나의 사업으로 묶을 필요가 있다.

미코하라의 논과 서수면의 들판은 다르다. 그러나 “우리 대에서 끝난다”는 체념을 “우리 쌀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꾼 과정은 그대로 따라 걸을 수 있다. 이제 서수 쌀이 자기 이야기를 할 차례다.

참고 자료

※ 본문의 수치는 아래 자료를 교차 확인한 것이며,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최연호 편집국장

첫 면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