瑞穂新聞 서수신문
제2호 · 서수면 옥구농민 항쟁사

서수 이엽사 농장의 실체 (二葉社 農場의 實體)

1904년에 한국에 온 가와사끼료타로(川崎藤太郎)는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인 하기하라(萩原秀一)의 권유에 따라 옥구군 서수면에 900여 두락(1斗落은 한마지기 논 200평, 밭 300평), 약 20만평에 이르는 토지를 매입하여 가와사키농장(현 임피중학교)을 설치하였다.

일본 국수주의자인 가와사끼는 서수면(동이면)을 자기 고향인 니이가타현 기타칸바라군(新潟縣北浦原郡)을 모델로 하여 일본화할 계획을 처음부터 추진하였다.

먼저 자기와 뜻이 맞는 가타기리(片桐) 시부다니(澁谷) 등 고향 지주들을 서수에 불러들여 농장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기타기리(片桐和二)는 川崎의 안내을 받아 1908년에 옥구군 서수면 뿐만 아니라 익산군 황등과 김제군에 농장을 설치하였으며 임익수리조합(臨益水利組合)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여 2대 조합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달관산(達觀山, 현 황등산)을 매수하여 석산(石山)을 개발하여 일본에 가져가기도 하였다.

가와사키는 일인 농부 10인을 불러들여 조선인 소작인들을 감독하도록 하였고 보수로 12정보의 농지에 대한 자작권을 부여하였다고 한다.

1909년 봄에는 고향의 향토신을 옮기어 하용리(하용전 마을)에 서수신사(瑞穗神社)를 세워 서수면을 일본 자기고향 화하기 위한 정신통제수단으로 일본신도(日本神道)의 위력으로 소작인들을 공포속에 몰아넣어 꼼짝도 못하게 하였다. 군산공원에 세운 군산신사보다 6년이나 앞서서 세운 것으로 보아 가와사키의 제국주의 의식과 면모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가와사키농장은 근대적인 대규모 농장이라는 영농조직체에서 보안조직체이고 식민조직체이기도 하였다. 그는 농장을 설치하자마자 〈실천회〉라는 경비대를 편성하였고 1910년에는 소작인을 대상으로 금융업을 경영하려고 〈서수식산조합〉을 설립하여 소작인을 지주 마음대로 예속시켜 조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니가타 현 출신의 시로세, 가다기리, 히로가와, 마끼등 농장주들의 자본을 모아 1911년 이엽사농장(二葉社農場)을 만들었고 1926년 가와사키가 사망하자 서수의 가와사키농장을 매입하고 이엽사 사무소를 전주부에서 서수부로 이전하였다.

이때 합명회사에서 주식회사로 전환한 이엽사농장은 전주부, 삼례부, 황등부, 서수부 등으로 나누어 논 1,000정보(3백만평) 밭 200정보(60만평)와 1,700명의 한국인 소작인을 거느리는 대농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가와사키 사망으로 같은 고향의 사이또오가 총지배인으로 취임하였고 승마를 좋아하였던 사이또오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이엽사농장에 소속된 삼례농장 황등농장 서수농장을 순찰하였다고 한다.

사이또오(齊藤信一)가 농장을 승마복에 권총을 차고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말채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말을 타고 소작인들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위세를 부릴 때에는 겁에 질린 노인과 부녀자들은 집안에 숨어야 했고 남자들은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이또오는 고개하나 끄덕이는 법이 없었다고 하며 봉건시대 통치자인 영주나 다름없는 오만 불손한 태도였다고 한다.

주식회사 이엽사농장은 하나의 관청이상의 대기업 조직이였다고 볼 수 있으며 이엽사농장은 일본내에서도 1,000정보 이상 소유한 지주 수는 북해도에 13명 본토에는 9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규모를 짐작케 한다.

그럼에도 우리 한반도에는 34명이나 있었고 그 중에서도 전라북도에는 가장 많은 9명이 있었다고 한다. 1위는 구마모토 농장(3,358정보) 2위 이엽사농장(1,425) 3위가 시다마니농장(1,231) 순이였다고 한다. (출처: 군산문화원. 향토문화대전)

이와같이 100여년전의 서수면의 불행했던 역사적 과거의 사실을 우리는 배우고 기억하며 이를 승화시키기위한 노력들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며 보다 미래 발전적인 방안을 창출하는데 우리 모두가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이에 필자는 2016년 니가타현 문화청에 메일을 보내 현재 이엽사의 존재 유무 및 관련 후손들을 찾아 달라는 메일을 보낸적이 있다.

이에 대한 니가타현 문화청의 대답은 이엽사는 한국으로 자본투입이 많아서 1946년 결국 도산하여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답변을 받은적이 있다. 1945년 일본패망으로 빈손으로 도망가기에 바빴을 처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는 일이긴 하나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을 것이 있다"는 말처럼 분명 후손들은 잘 살고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에 이엽사 후손을 찾아 가해자의 후손과 피해자의 후손들이 모여 과거 우리고장의 역사를 더듬어 가며 순수한 민간차원의 미래 지향적 상호교류를 논해 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시도해 본 것이였다. 물론 시간도 걸리고 자본도 들겠지만 이 또한 우리가 해야 할 필연적인 사안 인지도 모른다.

하나 하나의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진정한 교류만이 미래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지면 서수신문 제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