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11월 25일
― 서수 들판에 묻힌 백 년의 약속

1927년 1월 6일, 김영준의 집에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방은 작았고 등잔불은 어두웠다. 그러나 지난겨울 기석이 처음 찾아왔을 때보다 사람은 많아졌다. 서수와 호산리 일대에서 논을 부치는 농민들이 벽에 등을 붙이고 빽빽이 앉았다.
그날 광명농우회가 만들어졌다. 겉으로는 가난한 농민들의 친목을 위한 모임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밥을 나눠 먹고 안부만 묻기 위해 밤길을 걸어온 것이 아니었다.
“혼자 가서 소작료 깎아달라고 혀봤자 논만 뺏겨.”
“그럼 여럿이 가면?”
“여럿이 논을 뺏기겄지.”
봉칠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기석도 따라 웃다가 입을 다물었다. 농담 속에 두려움이 들어 있었다.
장태성이 말했다.
“여럿이 함께 말하면 농장도 함부로 한 사람만 내칠 수 없습니다.”
“경찰이 오면?”
“그때도 함께 있어야지요.”
복순은 방문 밖에서 그 말을 들었다. 기석이 절대 따라오지 말라고 했지만, 옥례와 함께 멀찍이 뒤따라온 참이었다.
“엄니.”
“왜.”
“아부지가 물꼬 보러 간다더니 여기 왔네.”
“겨울밤에 물꼬 보러 간다는 말을 믿었어?”
두 사람은 소리 죽여 웃었다.
봄과 여름이 지나며 모임은 마을과 마을로 번졌다. 김영준은 사람들이 모일 자리를 마련했고, 김영현은 농민이 왜 농사를 잘 짓고도 가난한지 질문을 던졌다. 장태성과 박상호, 김행규 등은 소작농을 만나 계약과 소작료 문제를 들었다.
복순도 기록을 이어갔다. 어느 집이 소작권을 잃었는지, 누가 수세를 내지 못했는지, 농장 관리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날짜와 함께 적었다. 모르는 글자는 빈칸으로 두었다가 나중에 채웠다.
1927년 10월 3일,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가 조직되었다.
평소에는 각자의 논에서 허리를 굽히던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다. 기석은 사람 수를 보고 얼굴이 굳었다.
“이렇게 많이 모이면 경찰도 다 알겄다.”
옥례가 말했다.
“당신은 사람이 적으면 힘이 없다고 걱정허고, 많으면 들킬까 걱정허네.”
“걱정도 못 혀?”
복순이 끼어들었다.
“아부지는 걱정하는 게 일이여.”
“니 둘이 나를 아주 잡어.”
기석은 투덜거리면서도 돌아가지 않았다.
11월 9일, 서수지부 총회가 열렸다. 조합원의 이름이 한 사람씩 불렸다.
“김행규.”
“예.”
“박상호.”
“예.”
“신문관.”
“예.”
문밖에 선 복순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평소에는 누구네 아버지, 어느 집 머슴, 농장 소작인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그날은 자기 이름으로 대답했다.
복순은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이름을 적었다. 글씨는 아직 고르지 못했지만 한 사람도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농민들은 이엽사가 요구한 소작료를 낮추고, 소작료 납부 방식과 포대 문제를 고칠 것을 요구하기로 했다. 협상이 끝나기 전까지 소작료를 내지 않고 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르자는 결의도 이어졌다.
장태성이 사람들 앞에 섰다.
“우리가 특별한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지은 사람이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맞소!”
“올해 쌀 한 섬을 만들기까지 누가 일했습니까?”
“우리가!”
“누가 모를 심었습니까?”
“우리가!”
“누가 물을 지키고 김을 맸습니까?”
“우리가!”
장태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왜 쌀이 농장 창고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아무 권리도 없는 사람이 됩니까?”
방 안이 뜨거워졌다. 복순은 옥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딸을 보고 있었다.
우리가 키웠는데 왜 우리 것이 아닌가.
옥례가 오래전 빼앗긴 논 앞에서 했던 질문이었다. 복순이 빈 쌀독을 보며 되풀이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날에는 수많은 사람의 입에서 같은 질문이 나왔다.
한 농민이 손을 들었다.
“농장이 논을 뺏으면 어떡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 같이 지키면 되제.”
“경찰이 오면?”
김행규가 대답했다.
“그때도 같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다만 한 사람이 두려울 때 옆 사람이 떠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소작료 납부일이 가까워지자 이엽사도 움직였다. 농장 측은 사람들을 따로 불러 겁을 주고 달랬다.
“당신만 먼저 내시오.”
“조합을 믿다가 소작권을 잃으면 누가 책임질 거요?”
몇몇 농민은 밤중에 몰래 쌀을 내려고 했다. 조합은 청년들을 마을 길목에 세웠다. 배신자를 잡기 위해서라기보다 두려움에 혼자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지키려는 일이었다.
11월 24일 밤, 기석은 잠들지 못했다.
“뭔 생각혀?”
옥례가 물었다.
“내일 쌀 안 내면 논 뺏길 수도 있어.”
“그려.”
“겨울에 굶을 수도 있고.”
“그려.”
“당신은 안 무서워?”
옥례가 잠든 척 누워 있는 복순을 바라봤다.
“무서워.”
“근디?”
“다른 사람은 버티는디 우리만 몰래 쌀 냈다고, 저 애한테 말하는 것이 더 무서워.”
기석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안 낼게.”
옥례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같이 무서워하면 좀 낫겄지.”
1927년 11월 25일.
소작료 납부일 아침, 농장으로 가는 길은 텅 비어 있었다. 다른 해라면 볏섬을 실은 달구지와 지게꾼이 줄을 이었을 길이었다. 밤새 내린 서리만 논둑과 볏짚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빈 길이 대답이었다.
그날 오후 서수주재소에는 이엽사 농장 관리자와 경찰, 면 관계자가 모였다. 농장 관리자가 책상을 두드렸다.
“이대로 두면 한 톨도 못 걷습니다.”
경찰이 물었다.
“누가 주동자요?”
“장태성이오.”
그들은 머리를 잡으면 사람들이 흩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경찰은 구인장도 없이 장태성을 붙잡았다.
“잠깐 갑시다.”
“영장은 있소?”
대답 대신 포승줄이 나왔다. 장태성은 저항하지 않았다. 곁에 있던 농민들까지 죄인으로 몰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경찰은 그를 임피역전 경찰관출장소로 끌고 갔다. 가는 길에 장태성은 이진섭을 발견했다.
“진섭이 형!”
이진섭이 돌아보자 포승줄에 묶인 장태성이 보였다.
“박상호한테 알려주시오! 내가 잡혀간다고!”
순사가 그의 등을 밀었다.
이진섭은 잠시 얼어붙었다. 한쪽 길 끝에는 끌려가는 장태성이 있었고, 다른 길 끝에는 마을이 있었다.
그는 돌아섰다. 논둑을 가로질러 달렸다. 짚신 한 짝이 벗겨졌지만 줍지 않았다.
박상호의 집에는 김행규와 신문관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진섭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었다.
“태성이가 잡혀갔어!”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어섰다.
“영장은?”
“없어.”
방 안의 등잔불이 흔들렸다. 오늘 장태성이 잡혀가고 사람들이 침묵하면, 내일은 또 다른 사람이 끌려갈 것이었다.
누군가 물었다.
“우리 몇 명이 쫓아가면 되겄어?”
신문관이 문을 열었다. 찬바람 너머로 어두워지는 들판이 보였다.
“사람들한테 알려야 혀.”
“어떻게?”
신문관이 들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징을 쳐.”
“징을?”
“우리한테 총이 있어, 칼이 있어? 그래도 소리는 있잖여.”
청년 하나가 마을 처마 밑에 걸린 징으로 달려갔다. 모내기가 끝난 날, 타작이 끝난 날 울리던 징이었다.
청년이 징채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손이 높이 올라갔다.
그리고 서수의 저녁을 깨우듯 힘껏 내려왔다.
댕―
글: 최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