瑞穂新聞 서수신문
연재소설 《천년의 미(米)》 제5회

농부의 이름

― 서수 들판에 묻힌 백 년의 약속

고려가 끝나고 조선이 시작되었다. 왕이 바뀌고 법과 관리가 달라졌지만 들판에는 다시 봄이 왔다. 농부들은 지난해 남겨둔 볍씨를 꺼내 물에 담갔다.

세월이 더 흘러도 임피는 여전히 현이었다. 현령이 부임하고, 한 사람이 떠나면 또 다른 현령이 왔다. 그해 봄에도 새 현령이 온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길가로 모였다. 옥분이 아들 석구의 머리를 눌렀다.

“숙여.”

“왜?”

“사또 나리 오시잖여.”

“내가 뭘 잘못했는디?”

“잘못해서 숙이는 거 아녀.”

“그럼?”

옥분이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박 서방이 말했다.

“높은 분이니께 숙이는 겨.”

석구가 물었다.

“얼마나 높은디?”

“종오품이래.”

“종오품이 뭔디?”

박 서방이 입을 다물었다.

“모르잖여.”

“알 필요 없어!”

사람들이 웃었다. 옥분은 아들의 뒤통수를 가볍게 쳤다.

“입 다물어.”

석구는 투덜거렸다.

“물어볼 수도 있지.”

사또의 행렬이 지나갔다. 사람들은 허리를 숙였고, 말발굽이 흙길을 두드렸다. 행렬이 사라진 뒤에도 석구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엄니.”

“왜.”

“저 양반도 농사져?”

“안 짓겄지.”

“그럼 쌀은 누가 줘?”

옥분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우리가.”

“왜?”

“아이고, 좀 조용히 혀!”

석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옥분은 아들의 귀를 잡아당겼고 사람들이 다시 웃었다.

그 시절 관아에는 최치복이라는 아전이 있었다. 글씨를 잘 썼고 셈도 빨랐다. 농민들은 그를 싫어하면서도 필요로 했다. 글을 읽거나 관아의 문서를 알아볼 일이 생기면 결국 그를 찾아갔다.

“치복이 형님, 이것 좀 읽어줘.”

“돈은?”

“무슨 돈?”

“공짜로 해달라고?”

“이웃끼리 돈을 왜 받아.”

치복이 혀를 찼다.

“그러니까 네가 평생 가난한 겨.”

그러면서도 그는 문서를 받아 끝까지 읽어주었다.

어느 날 석구가 관아에 왔다. 방 안에는 장부가 높이 쌓여 있었다.

“저게 다 뭐여?”

치복이 대답했다.

“사람과 땅과 곡식.”

“사람도 적어?”

“적지.”

“그럼 우리 엄니도?”

“호적에는 있겄지.”

“우리 논도?”

“있고.”

석구는 장부를 한참 바라보았다.

“사람하고 땅하고 쌀이 다 적혀 있네.”

“그려.”

“그럼 누가 제일 중요혀?”

치복이 웃었다.

“갑자기 뭔 소리냐?”

“셋 중에서.”

치복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나라에서는 셋 다 중요하지.”

석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디 사람은 죽고, 땅은 뺏기고, 쌀은 가져가잖여.”

치복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누가 그런 말을 했냐?”

“아무도.”

“근디?”

“보면 알잖여.”

치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그는 등잔불 아래서 장부를 넘겼다. 수많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름이 장부에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존중받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역사는 기록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누구의 눈으로 기록했는지가 더 중요할 때도 있었다.

또 세월이 흘렀다. 비가 사흘째 내리자 가뭄 끝의 단비라며 사람들이 웃었다. 아이들은 처마 밑에서 손을 내밀었고, 여자들은 물동이를 채웠으며, 농부들은 논에 차오르는 물을 반겼다.

닷새째가 되자 웃는 사람이 줄었다. 물이 둑 가까이 올랐다. 일곱째 날 밤, 마을 사람들이 ‘물돌이’라 부르던 늙은 농부가 빗속에서 소리쳤다.

“나와! 둑이 넘어간다!”

남자들이 삽을 들고 뛰어나왔다. 여자들은 흙을 담았고 아이들도 돌을 날랐다. 그 위로 비가 쉬지 않고 쏟아졌다.

“윗둑을 터야 혀!”

“미쳤어? 그러면 우리 논 다 죽어!”

“안 터면 마을이 잠겨!”

“니 논 아니라고 막말허냐!”

삿대질이 몸싸움으로 번지려는 순간, 갓난아이를 등에 업은 월선이 빗속으로 나섰다.

“논이 사람보다 중요혀?”

사람들이 멈췄다.

“벼는 내년에 또 심어! 사람 죽으면 다시 심을 수 있어?”

한 사내가 젖은 얼굴을 훔치며 말했다.

“근디 저 논이 우리 전부여.”

월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알어. 그래도 살아야 내년에 다시 농사짓제.”

사람들은 결국 윗둑 일부를 터뜨렸다. 물이 굉음을 내며 들판으로 쏟아졌고, 횃불 아래에서 벼가 잠겼다. 한 해 농사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어떤 사람은 울었고, 어떤 사람은 욕했으며, 어떤 사람은 진흙 위에 주저앉았다.

비가 그친 뒤 월선의 남편 길복은 잠긴 논을 바라보았다.

“다 끝났네.”

“안 끝났어.”

“뭐가 남았는디?”

월선은 등에 업힌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길복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월선이 물었다.

“씨앗은?”

“조금 있어.”

“그럼 안 끝났어.”

“겨울을 어찌 버텨.”

“버텨야제.”

“말은 쉽지.”

월선이 남편을 노려봤다.

“그럼 죽을래?”

“누가 죽는대!”

“살 거면 그런 얼굴 하지 마.”

길복이 피식 웃었다.

“당신은 무서운 게 없어?”

“많지.”

“근디?”

“무서워도 살아야지.”

그해 겨울 사람들은 굶었다. 서로 곡식을 빌렸고 산에서 뿌리를 캤으며, 먹을 것이 생기면 아이들에게 먼저 주었다. 그래도 종자로 쓸 볍씨만큼은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다.

한 집에서 볍씨를 먹었다는 소문이 나면 이웃들이 조금씩 씨앗을 나눠주었다.

“우리도 먹을 게 없는디 왜 줘?”

월선이 대답했다.

“저 집이 내년에 농사 못 지으면 우리도 굶어.”

봄이 오자 관아에서는 큰물의 피해를 조사하러 아전을 보냈다. 장부에는 물에 잠긴 논이 몇 결인지, 무너진 집이 몇 채인지, 죽은 소가 몇 마리인지가 적혔다. 아전은 먹을 것이 떨어진 집의 수와 빌려준 곡식의 양도 물었다.

그러나 누가 먼저 빗속으로 뛰어들었는지, 누가 자기 논을 버리고 윗둑을 텄는지, 누가 마지막 볍씨를 이웃에게 나눠주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길복이 장부를 들여다보다 말했다.

“여기에는 당신 이름이 없네.”

월선이 젖은 볍씨를 널며 대답했다.

“내 이름이 벼를 키워?”

“그래도 당신이 마을을 살렸잖여.”

“나 혼자 살렸간디? 다 같이 삽 들고 흙 날랐제.”

길복은 더 말하지 못했다. 장부에는 이름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큰물이 났던 밤 월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느 집이 씨앗을 나누었는지, 누가 끝까지 둑 위에 남았는지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농부의 이름은 종이보다 사람의 입에서 더 오래 살아남기도 했다.

윗논이 물을 다 가지면 아랫논이 죽고, 한 집이 볍씨를 독차지하면 마을이 죽는다. 사람들은 싸우고 욕하고 서로 미워하면서도, 끝내 씨앗을 나누며 같이 살아남았다.

현령은 떠나면 다른 현령이 왔다. 장부는 낡으면 새 장부로 바뀌었다. 농부의 이름은 기록에서 지워지기도 했지만 그들이 지킨 논과 볍씨는 자식에게, 다시 그 자식에게로 넘어갔다.

그 이름 없는 계보의 끝에서 훗날 귀덕이라는 여인이 손녀 옥례에게 볍씨를 고르는 법을 가르치게 된다.

시대마다 농부의 이름은 달랐지만, 그들의 손에 남은 흙은 같은 들판의 흙이었다.

필자 최연호 | 전 KOTRA 수출전문위원 · 현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 역사소설 《천년의 미(米)》 저자

다음 회는 군산신문 연재 후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