瑞穂新聞 서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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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천년의 미(米)》 제8회

땅의 주인이 바뀌다

― 서수 들판에 묻힌 백 년의 약속

문서 한 장으로 조상 대대로 농사짓던 논을 빼앗기는 농민 부부 삽화
문서 한 장으로 조상 대대로 농사짓던 논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을 표현한 역사소설 자료 이미지. 이미지 제작: 서수신문 편집국·AI 생성 이미지 ※ 실제 인물·현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이상한 순간은 어제까지 자기 것이었던 것이 오늘 갑자기 남의 것이 되는 때다.

집도 그렇다. 땅도 그렇다. 나라조차 그랬다.

처음에는 믿지 않는다.

“설마.”

그다음에는 화를 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여.”

마지막에는 종이 한 장이 나타난다. 도장이 찍혀 있고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가 적혀 있다. 그리고 누군가 말한다.

“이제부터 이것은 당신 것이 아닙니다.”

그때 사람은 알게 된다. 자기가 믿었던 것보다 세상은 훨씬 쉽게 바뀐다는 것을.

1906년 봄, 서수리에는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가와사키가 이용휴 집안의 땅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용휴는 지역에서 이름난 유학자이자 지주였다. 가와사키 측이 조카의 빚을 구실로 장정 여러 명을 앞세워 이용휴의 집에 들어가 강제로 증서를 쓰게 했다는 말이 퍼졌다. 이후에도 협박과 구금이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 일을 큰 소리로 말하지 못했다. 장터 한쪽, 주막 뒤편, 사람이 뜸한 논두렁에서 주위를 살핀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용휴 어른 아들이 끌려갔다며?”

“쉿.”

“왜?”

“순사가 들으면 어쩌려고.”

“여기 순사가 어디 있어?”

“없어도 누가 들을지 아냐.”

춘매가 혀를 찼다.

“참 좋은 세상이네. 도둑놈 욕하려면 도둑놈 없는 데서 해야 하니께.”

만돌이 다급히 말했다.

“니 입 좀 다물어.”

“왜?”

“오래 살고 싶으면.”

춘매가 만돌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오래 살아서 뭐 혀?”

만돌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들도 웃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웃었을 말이었지만 이제 웃음에도 눈치를 봐야 했다.

소문은 소문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인 농장이 넓어질수록 땅에 관한 문서도 늘어났다. 누구 땅인지, 얼마에 사고팔았는지, 누구에게 빚이 있는지를 적은 종이가 사람보다 먼저 관청과 농장사무소를 오갔다.

글을 모르는 농민에게 문서는 벽과 같았다. 자기 이름이 쓰였어도 읽을 수 없었고, 도장이 찍혔어도 무엇을 인정한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조상 대대로 갈아온 논보다 새로 작성된 종이가 더 큰 힘을 갖기 시작했다.

기석이 집에 돌아온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문을 여는 소리부터 평소와 달랐다. 옥례가 물었다.

“어딜 갔다 와?”

“사람 좀 만났어.”

“누구?”

기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옥례는 보리밥과 된장, 김치 몇 조각을 밥상에 올렸다. 기석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왜 안 먹어?”

“배 안 고파.”

옥례가 남편의 얼굴을 살폈다.

“뭔 일 있는 겨?”

기석이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우리 논 말이여.”

옥례의 손이 멈췄다.

“응.”

“아버지한테 받은 아래 논.”

“왜?”

“문서가 이상허대.”

“뭐가?”

“모르겄어.”

“뭘 모르는디?”

기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도 모르겄다고!”

옥례가 조용해졌다. 기석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잠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혀.”

“누가 뭐래?”

“누가 샀다고 혀.”

“누가?”

기석은 입을 다물었다.

“일본 사람이여?”

기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옥례는 밥상을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안 팔았잖여.”

“그려.”

“근디 어떻게 남의 것이 돼?”

“나도 모른다.”

옥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모르면 알아봐야지!”

“알아봤어!”

기석도 소리를 질렀다.

“알아보니께 문서가 그렇대!”

“무슨 문서!”

“나도 모른다니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화를 낼 사람은 따로 있었지만 눈앞에는 서로밖에 없었다. 기석의 분노는 무지에서 왔고, 옥례의 분노는 억울함에서 왔다. 그러나 어느 쪽도 종이 위의 글자를 바꿀 수 없었다.

그때 옥례가 울기 시작했다. 기석은 아내가 왜 우는지 알았다. 땅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들을 잃었을 때도 옥례는 그렇게 울지 않았다. 슬픔에는 대상이 있었다. 죽은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울 수 있었다.

하지만 빼앗긴 논은 눈앞에 있었다. 내일도 거기 있을 것이었다. 벼도 자라고 물도 흐를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남의 땅이라고 했다. 그것은 슬픔보다 모욕에 가까웠다.

“우리 아버지가 저 논 갈았어.”

기석이 고개를 숙였다.

“알어.”

“우리 할아버지도 갈았어.”

“그려.”

“내가 어릴 때 저 논에서 미꾸라지 잡았어.”

“알어.”

옥례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말했다.

“내 손으로 모도 심었고, 장마에는 물꼬도 봤어. 논이 마르면 밤중에 물도 댔어.”

기석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근디 종이에는 그런 게 하나도 안 적혀 있겄지?”

“…….”

“누가 논을 갈았는지, 누가 물을 댔는지, 누가 그 논에서 자식을 키웠는지는 안 적고 누구 땅인지만 적혀 있겄지?”

기석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내일 다시 알아볼게.”

“어디 가서?”

“관아에도 가보고, 문서 읽을 줄 아는 사람도 찾아보고.”

“그러면 달라질까?”

기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아래 논으로 갔다. 봄물이 얕게 고여 있었고 햇빛이 수면 위에서 부서졌다. 논은 전날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두렁도 그대로였고 물길도 그대로였다.

기석이 논으로 내려서려 하자 낯선 관리인이 길을 막았다.

“무슨 일이오?”

“우리 논 보러 왔소.”

“이제 농장 소유요.”

“우리가 안 팔았소.”

관리인은 서류를 내밀었다.

“문서가 있소.”

기석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글자를 몇 자 알아보았지만 문장의 뜻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이름과 아버지 이름을 찾으려 했으나 낯선 글자와 숫자만 눈에 들어왔다.

옥례가 물었다.

“거기 뭐라고 쓰여 있어?”

기석은 한참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모르겄어.”

관리인이 종이를 도로 가져갔다.

“앞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농장과 소작 계약을 하시오.”

옥례의 얼굴이 굳었다.

“우리 논에서 우리가 농사짓는디, 누구 허락을 받으라는 겨?”

“이제 당신들 논이 아니오.”

말은 짧았다. 그러나 그 말 하나가 조상과 자식 사이를 끊었다. 어제까지 주인이었던 사람은 하루아침에 소작인이 되었다. 땅을 떠나지 않았는데도 땅에서 밀려난 셈이었다.

옥례는 논두렁의 흙을 한 줌 집었다. 젖은 흙이 손금 사이로 스며들었다. 흙은 여전히 익숙한 냄새가 났다. 사람의 문서는 주인을 바꾸었지만 흙은 누구 손에서 땀을 흘렸는지 잊지 않은 것 같았다.

옥례가 기석에게 물었다.

“근디 어째서 종이 한 장이 우리보다 오래 산 겨?”

기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멀리서 탑천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물은 논의 주인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낮은 곳으로 흘렀다.

그러나 사람의 세상에서는 종이 한 장이 물길보다 먼저 땅의 주인을 바꾸고 있었다.

필자 최연호 | 전 KOTRA 수출전문위원 · 현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 역사소설 《천년의 미(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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